‹ 목록으로 회귀했더니 짝사랑이 있었다니

4화

옥상에서의 그날 이후로 태민은 이상하게 나를 더 자주 붙잡고 늘어졌다. 점심시간마다 슬쩍 옆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퇴근 후에도 굳이 나를 데리고 술자리를 만들었는데, 그 끈질긴 관심이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 마음이 복잡했다. 처음 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겼지만, 사흘 나흘 이어지자 그건 명백히 의도된 접근이었다. 마치 뭔가를 알아내야만 한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살피는 그의 태도에, 나는 매번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얼버무리곤 했다. "야, 오늘은 진짜 솔직하게 말해봐." 그날 저녁, 회사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앞에 두고 태민이 다시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과 달리 장난기가 빠져 있었고, 그 진지함이 오히려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나는 잔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침묵하다가, 결국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이 사람만큼은, 어쩌면 믿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나는 진실 대신 절반의 진실을 꺼내기로 했다. 포장마차 안은 좁고 후텁지근했다.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터졌고, 연탄불 위에서 꼼장어가 지글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음들 사이에서 나는 잔을 든 손이 살짝 떨리는 걸 감추려 애썼다. "…나 사실, 예전에 사귀던 사람한테 크게 배신당한 적이 있어." 내가 말을 꺼내자 태민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그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는데, 그 시선이 어찌나 곧은지 나는 순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잔 쪽으로 시선을 떨궜다. "배신? 무슨 소리야." 그가 재차 물었다. 목소리에는 걸려든 것도 같고 놀란 것도 같은, 묘한 톤이 섞여 있었다. "오랫동안 만나던 여자가, 나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어.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이별을 통보하더라고." 말을 이어가는 동안 목이 타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담담한 척 말을 마쳤다. 사실 이건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첫 번째 삶에서 겪었던 일들 중 일부를, 시점만 바꿔서 꺼낸 것뿐이었으니까. 다만 그 진짜 이유, 시간이 반복되고 있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사실만은 끝내 꺼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다르게 살고 싶어. 예전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로 당하고 싶지 않거든." 이 말을 하면서 나는 손끝으로 잔 테두리를 매만졌다. 손톱 끝이 유리에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태민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소주잔을 단숨에 비우고 나서 낮게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힘들었겠다."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나는 그 순간 조금은 마음이 풀리는 걸 느꼈다. 아, 이 사람은 정말로 나를 걱정하고 있었구나. 물론 타임루프라는 진짜 이유는 끝내 말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 결심의 절반은 그에게 전달된 셈이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태민은 나에게 어깨를 툭 치며 "너무 애쓰지 마라"는 말을 남겼다. 그 말이 왜인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날 이후로 태민은 더 이상 나를 캐묻지 않았다. 대신 이상하게도, 그의 관심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서윤아였다. 처음에는 별거 아닌 질문들이었다. 회의 자료를 누가 정리했는지, 저 자리 사람은 원래 저렇게 조용한 성격인지. 하지만 그 질문들의 빈도가 점점 늘어가는 걸 나는 눈치채고 있었다. "저기, 서윤아 씨 있잖아." 어느 날 점심시간, 태민이 넌지시 나에게 말을 꺼냈다. 식판을 앞에 두고 젓가락으로 나물을 뒤적이던 그의 손이 순간 멈췄다. "그 사람 좀 특이하지 않아? 조용한데 은근히 세심하잖아. 남들 안 보는 것도 다 챙기고." 그의 눈빛에서 나는 낯익은 감정을 읽어냈다. 관심. 순수한 호기심 이상의 관심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왜 하필… 태민마저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나는 그 감정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거짓말이었다. 나는 이미 그녀가 얼마나 세심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삶에서 그녀가 누구보다 나를 먼저 알아봐 주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그 사람을, 이제는 태민이 눈여겨보고 있다니. "근데 왜 갑자기 서윤아 씨 얘기를 해." 나는 애써 태연하게 물었지만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졌다. 태민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냥. 궁금해서." 그 대답이 어찌나 가벼운지, 나는 오히려 그 가벼움 뒤에 숨겨진 무게를 감지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 사건이 벌어졌다. 오후 업무가 한창일 무렵, 나는 야근 준비를 하며 책상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문득 서랍 한쪽에 놓인 아이스커피를 발견했다. 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내 자리에만 놓여 있던 그 커피가, 첫 번째 인생에서와 똑같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던 거였다. 컵에 맺힌 물방울이 서랍 안쪽까지 촉촉하게 적셔 놓았고, 그 서늘한 감촉이 손끝에 닿는 순간 심장이 다시 한번 쿵 내려앉았다. 이걸 도대체 언제 놔둔 걸까. 나는 그 커피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며 주위를 살폈는데, 하필 그 순간 팀원 몇 명이 내 자리 근처를 지나가다 걸음을 멈췄다. "어? 이도현 씨 자리에 커피가 왜 있어요?" 옆 팀 김 대리가 웃으며 물었다. "누가 사다 준 거예요?" 그 질문에 나는 순간 말이 막혔고, 주위 시선이 일제히 내 자리로 쏠리는 걸 느꼈다. 사무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저 멀리 자기 자리에서 이쪽을 흘깃거리던 서윤아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얼굴은 이미 붉어지기 시작했고, 시선은 다급하게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손끝으로 마우스를 붙잡는 그녀의 동작이 부자연스럽게 뚝뚝 끊겼다. 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순식간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걸 느끼며 김 대리를 향해 얼른 둘러댔다. "아, 이거 제가 아까 사서 놔둔 거예요. 깜빡하고 있었네요." 그 말이 얼마나 어설픈지 나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다행히 김 대리는 별생각 없이 웃어넘기며 자리를 떠났다. 후우. 나는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앉았다. 이마에 옅게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태민의 시선이 서윤아와 나를 번갈아 오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의 눈빛에는 이제 막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한, 미묘한 그늘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무언가를 확신한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눈치챈 건가.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애써 모니터에 집중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퇴근길에 태민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는 다른,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이도현. 잠깐 얘기 좀 하자."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온몸이 굳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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