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짝사랑은 오해로 핀다

2화

다음 날 아침, 교실로 들어서는 강서윤의 발걸음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여유가 묻어 있었지만, 창문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유난히 눈에 시리게 느껴질 만큼 그녀의 속마음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편안하지 않았다. 벌칙 게임이었다는 사실은 다행히 반 아이들 사이에 퍼지지 않았고, 대신 강서윤이 이하준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소문만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마치 물이 종이에 스며들듯 교실 곳곳으로 번지고 있었다. "야, 진짜 웃기지 않냐." 김유나가 자리에 앉으며 낮게 속삭였다. "강서윤이 차이는 날이 오다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네." 박소연도 옆에서 킥킥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것도 두 번이나 확인당했다며. 완전 레전드다, 이건." 서윤은 애써 무심한 표정으로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으며 대꾸했다. "어차피 벌칙이었잖아. 상관없어."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손끝으로 펜을 매만지는 동작이 평소보다 조금 더 잦았고, 필통 지퍼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손짓에도 미묘한 조급함이 배어 있었다. 유나가 뭔가 더 물으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서윤이 먼저 책을 펼치며 시선을 피해버리는 통에 대화는 그대로 끊겼다. 수업 시간 내내 서윤의 시선은 몇 번이나 앞자리, 이하준의 뒷모습으로 향했다가 황급히 거둬들여지곤 했다. 그가 필기를 하는 옆모습이, 창밖을 잠깐 바라보다 다시 칠판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 무심한 옆얼굴이, 왜 이렇게 신경을 긁는지 서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벌칙이었을 뿐인데.' 속으로 되뇌면서도 펜을 쥔 손에 힘이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흘러가고, 방과 후 텅 빈 3층 복도에서 서윤은 이하준을 붙잡았다. 마침 도서관에서 나오던 그가 걸음을 멈추자, 서윤은 벽에 어깨를 기댄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복도에 깔린 오후의 빛이 창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와 두 사람 사이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어제 그거, 진짜로 받아들인 거야?" 서윤이 먼저 물었다.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그 아래로 미세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당연히 벌칙이었지, 몰랐어?" 하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선이 너무 담담해서, 서윤은 순간 자신이 무엇을 기대했던 건지조차 헷갈렸다. "짐작은 했어." 하준이 대답했다. "근데 벌칙이든 아니든, 고백이라는 말을 들었으면 성실하게 대답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그의 말투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고,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둔 답을 읽어 내려가는 것처럼 정갈했다. 그 대답에 서윤은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성실하게 대답이라니, 대체 누가 벌칙 고백에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반응하나 싶었지만, 동시에 명치 어딘가가 조여드는 감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어야 할 만큼 갑작스러운 통증이었다. 그녀는 애써 그 감각을 지워버리며 팔짱을 꼈다. "그럼 그 성실한 대답이라는 게," 서윤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없다는 그 말이었어?" "맞아." 하준의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짧았다. 그 단호함이 오히려 서윤의 가슴을 더 날카롭게 긁고 지나갔다. "착각하지 마." 서윤의 목소리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나 너 좋아한 적 없어. 그냥 게임이었을 뿐이니까,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알아." 하준은 짧게 대답했다. "그래서 나도 신경 안 써." 그 말이 오히려 서윤의 가슴을 더 답답하게 짓눌렀다. 신경 안 쓴다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어제 일이 그저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였던 것처럼. "……그래." 서윤이 짧게 내뱉었다.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졌지만 그녀는 애써 그것을 웃음으로 덮었다. "그럼 됐네. 서로 신경 안 쓰면 되는 거니까." 하준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가방끈을 고쳐 쥐었다. 그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서윤의 심장은 이상하게 반응했다. "됐어, 가." 서윤은 그렇게 말하며 먼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는데, 하준이 짧게 목례를 하고 반대쪽으로 사라지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발걸음은 여느 때처럼 또각또각, 일정한 속도로 복도를 울렸다. 그러나 복도 끝, 아무도 없는 계단 구석에 다다르자 서윤의 발걸음이 멈췄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을 거절했다는 사실이, 그것도 두 번이나 아무렇지 않게 확인당했다는 사실이, 이제야 온몸으로 밀려들었다. 늘 원하는 것은 손을 뻗기만 하면 되었던 열일곱 인생에서, 이하준이라는 이름 하나가 처음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존재로 남아버린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좋아한다고 말하면 상대가 좋아해줬고, 갖고 싶다고 하면 대부분 손에 들어왔던 그녀의 세계에서, 이런 종류의 거부는 처음이었다. 서윤은 계단 벽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듯 바닥에 앉아버린 그녀는,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팔을 얹은 채 고개를 떨궜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지만, 눈물은 결국 흐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 다른 감정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미쳤네, 진짜.' 서윤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러지, 별것도 아닌 일에.' 하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명치 안쪽이 계속 조여드는 것 같았고, 하준의 그 담담한 눈빛이 자꾸만 눈앞에 되풀이해서 떠올랐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서윤은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이대로는.' 그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온 순간, 계단 위쪽 어디선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서윤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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