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버림받은 영애의 약초밭

4화

"서윤! 여기 앉아!"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빨간 갈색 단발머리에 주근깨가 얼굴 곳곳에 박힌 소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김하나였다. 교실 안은 아침 특유의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 나무 책상이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의 웃음소리,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까지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낡은 의자가 삐걱, 작은 소리를 냈다. "너 저번에 그 뿌리 얘기, 진짜 신기했어." 하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도 약초밭에서 일하시는데, 그런 거 한 번도 못 알아채셨거든." 그 말에 나는 살짝 놀랐다. '약초밭이라니.' 우연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딱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초밭에서 일하세요?" "응! 가공 작업소에서도 일하시고." 하나가 자랑스럽게 답했다. 가슴을 쭉 내밀고 턱을 살짝 든 채였다. 꼭 자기 부모의 직업이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일인 것처럼. '이 아이가 그 밭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 수도 있겠다.' 나는 그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 밭에 요즘 이상한 점 없었어?" 하나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답했다. 눈동자가 위로 살짝 굴러가는 게, 정말로 뭔가를 떠올리려는 모습이었다. "음, 요즘 물이 잘 안 빠진대. 비 오고 나면 며칠씩 질척거린다고 아빠가 그랬어." 순간 어제 밤의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배수 문제가 맞았다.' 밤새 흙의 습도와 지형의 경사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세웠던 가설이었다. 그것이 이렇게 쉽게, 여덟 살짜리 아이의 입에서 확인될 줄은 몰랐다. 나는 그 사실을 마음속에 새기며 하나를 향해 웃었다. "고마워, 하나야. 진짜 도움이 됐어." 하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헤헤, 나 도움 됐대." 혼자 중얼거리듯 말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수업이 시작되자 윤도현 선생이 앞으로 나섰다. 훤칠한 키에 정갈하게 매어진 옷깃,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작은 임무를 드릴 겁니다." 그의 말에 아이들이 눈을 빛냈다. "학당 근처 밭에서 시들어가는 약초가 있습니다. 그 원인을 찾아보는 겁니다." 조를 나눠 진행되는 활동이었다. 나는 하나와 같은 조가 되었다. "우와, 서윤이랑 같은 조다!" 하나가 신이 나서 내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밭으로 나가는 길에 윤도현 선생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흐트러짐 없이 규칙적이었다. "강서윤, 저번 수업 때 정확한 판단이었어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알아챘는지 궁금합니다만." 나는 그 질문에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전생의 지식이라고 할 수도 없고.' 말할 수 없는 진실은 언제나 이런 순간에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냥, 손끝의 감각 같은 게 있었어요." 어색한 대답이었지만 그는 크게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가슴 안쪽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인정해준 게, 얼마 만이지.' 부모에게서는 결코 들을 수 없던 말이었다. 차갑고 계산적인 시선만 받아오던 곳에서, 이런 담백한 인정의 말은 낯설고 서툴게 다가왔다. 밭에 도착하자 시든 약초 몇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잎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뿌리 쪽 흙이 유난히 검게 젖어 있었다. 공기 중에는 습한 흙냄새와 함께 옅게 썩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코를 찌르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 정상적인 밭에서 날 냄새는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흙을 파헤쳐 보았다. 손끝에 닿는 흙은 차갑고 질척했다. '뿌리가 썩고 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흙에서 미끄덕한 감촉이 느껴졌다. 습기가 과하게 고여 있는 상태였다. "배수가 안 되고 있어." 나는 하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 근처 지형이 낮아서 물이 잘 안 빠지는 거야."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흙을 만져보았다. "진짜네, 여기 다른 데보다 훨씬 질척거려." 그녀는 손가락에 묻은 흙을 코 앞으로 가져가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으, 냄새도 좀 이상해." "썩은 뿌리에서 나는 냄새일 거야. 오래 방치되면 저렇게 돼." 내가 설명하자 하나는 신기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너 진짜 의원 같아." '의원이라니.' 전생의 삶을 생각하면 우습기까지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삶에서는, 그 말이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윤도현 선생이 우리의 대화를 듣고 다가왔다. "정확한 관찰이네요."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조금 낯설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든든했다. '이 작은 임무 하나가, 어쩌면 나에게 필요한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흙을 만졌다. 주변 아이들도 각자의 조에서 흙을 파헤치고 잎을 뒤집어 보며 나름의 관찰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잎사귀를 씹어보려다 선생에게 저지당하기도 했다. "그거 함부로 먹으면 안 됩니다!" 윤도현 선생의 다급한 목소리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밭 저쪽에서 다른 조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봐, 완전 다르게 시들었어." 그 목소리에는 확실히 당황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평소 같으면 신기해하는 정도였을 텐데, 지금은 뭔가 불편한 낌새가 느껴졌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봐도 그 밭의 약초는 우리가 조사하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잎이 누렇게 뜨는 게 아니라, 검게 오그라들어 있었다. 줄기 전체가 마치 불에라도 탄 것처럼 뒤틀려 있는 형태였다. '저건 배수 문제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증상이다.' 물이 고여서 뿌리가 썩는 것과, 잎이 검게 타들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원인에서 비롯된다. 전자는 습기 과잉, 후자는 대개 독성 물질이나 급격한 온도 변화, 혹은 병해충의 침입을 의심해야 하는 증상이었다. 뭔가 다른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며 미묘한 불안을 느꼈다. '이건 단순한 배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주변 아이들도 하나둘 그 밭 쪽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윤도현 선생의 표정에서도 순간 웃음기가 사라진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그 밭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말없이 잎을 들여다보았다. 평소의 여유로운 태도와는 다른, 딱딱하게 굳은 등이었다. '저 반응, 심상치 않다.' 단순한 학습용 임무라면 저런 표정을 지을 이유가 없었다. 이 학당의 밭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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