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 두 시까지 게임을 하다 잠든 탓에, 이준호는 알람이 세 번째로 울릴 때가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떴다.
핸드폰 액정에 뜬 시간을 확인하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그는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도 눈앞이 흐릿한 게 아직 잠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키는데, 어제 밤새 클리어하지 못한 던전의 잔상이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아침부터 기분이 개운하지 못했다.
마지막 보스 앞에서 파티가 전멸했던 장면이 자꾸 떠올라서, 준호는 씻으면서도 손가락으로 허공에 스킬 버튼을 누르는 시늉을 하다가 스스로도 헛웃음을 지었다.
식탁에는 어머니가 새벽에 나가며 차려놓은 밥이 랩에 덮인 채 놓여 있었고, 준호는 그걸 몇 술 뜨는 척하다가 결국 반도 못 비우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닫고 나오자 아침 공기가 제법 차가웠는데, 그 서늘한 기운이 얼굴에 닿는 순간에야 준호는 그제야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걸 실감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가는 내내 가방 속에서 필통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고, 겨우 잡아탄 버스 안에서 그는 창문에 이마를 대고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 애썼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은강고등학교 2학년 3반, 준호의 자리는 창가에서 세 번째 줄이었는데, 그 자리에 앉으면 딱 좋게 하늘이 옆자리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매일 들을 수 있었다.
"이준호, 또 밤새웠지." 박하늘이 책상에 팔을 걸치며 훅 들어오자, 준호는 눈도 못 마주치고 손사래만 쳤다.
"안 잤다니까." 그의 대답이 힘없이 늘어지는 것을 하늘이 놓칠 리 없었고, 그녀는 킥킥거리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눈 밑에 다크서클 봐, 판다가 따로 없네." 그녀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놀리자, 준호는 마지못해 눈을 비비면서도 반박할 기운조차 없었다.
"몇 판만 더 하고 자려고 했는데 시간이 그렇게 됐는지도 몰랐어." 그가 억울한 듯 중얼거리자, 하늘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네 반 애들도 다 알아. 이준호가 게임 때문에 인생 망하는 중이라는 거." 그녀의 말에 뒤에 앉은 아이들까지 웃음을 터뜨렸고, 준호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책상 위에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2학년 전체가 알고 있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강서린.
전교 2등의 성적을 놓치지 않는, 그러면서도 누구와도 사적인 말을 섞지 않는 얼굴이 서늘한 여학생이었는데, 아이들은 그녀를 뒤에서 '여제'라고 불렀다.
웃는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는 소문, 선생님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소문, 심지어는 그녀가 지나가면 복도의 공기가 한 뼘쯤 가라앉는다는 말까지 있었는데, 준호는 그런 소문들을 그저 흥미로운 옆반 이야기 정도로 흘려듣고 있었다.
한 번은 복도에서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서린은 곧게 뻗은 시선으로 앞만 보고 걸어갔을 뿐, 준호를 눈에 담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래서 준호는 강서린이라는 이름을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고, 굳이 그 이름을 오래 떠올릴 이유도 없었다.
적어도 그날 1교시 시작 전까지는 그랬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예비종이 울리기 직전, 아이들이 자리에 앉으며 부산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교실을 채우고 있었는데, 하늘은 준호의 필통에서 펜을 빌려 가며 여전히 그의 밤샘을 놀려대고 있었다.
교실 앞문이 드르륵 열리고, 반듯한 걸음으로 들어온 강서린이 곧게 뻗은 시선으로 교실을 훑는데, 그 눈이 이상하게도 준호의 자리 앞에서 멈췄다.
처음에는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한 아이들도 있었는데, 서린의 걸음이 곧게 준호의 책상 쪽으로 방향을 틀자 교실 안의 소음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일순 그녀를 따라 움직였고, 몇몇은 숨을 멈춘 채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하늘은 빌려 간 펜을 손에 쥔 채로 굳어버렸고, 준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도 설마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준호." 서린의 목소리가 짧고 건조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준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나를 왜.' 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교실 안의 시선이 온통 그에게 쏟아지는 걸 느끼면서도, 준호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그저 서린의 얼굴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저요?" 겨우 반문한 그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는데, 서린은 대답 대신 그의 책상 앞에 조용히 멈춰 섰다.
가까이서 본 서린의 눈매는 소문대로 서늘했지만, 그 안쪽 어딘가에는 준호가 미처 읽어내지 못한 다른 색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교실 전체가 숨죽인 가운데, 그녀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작고 낡은, 별 모양의 은색 배지였다.
배지 표면에는 오래된 흠집들이 자잘하게 나 있었고, 은빛이 다 벗겨져 나가 군데군데 회색빛을 띠고 있었는데, 그 낡음이 이 물건이 결코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거, 기억 안 나?" 그녀가 낮게 묻는 순간, 준호는 그 배지를 눈으로 훑으면서도 아무런 기억의 실마리도 떠오르지 않아 당혹감이 밀려왔다.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저런 배지를 가져본 적도, 본 적도 없다는 확신만 들 뿐이었는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명치 아래 어딘가가 저릿하게 당겨오는 감각이 있었다.
"그게... 뭔데요?" 그의 물음에 서린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는데, 그건 실망이라고 부르기도, 상처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색이었다.
잠깐이었지만 그녀의 입술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듯 벌어졌다가, 결국 다시 다물어지는 걸 준호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아니, 됐어." 그녀는 배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는 몸을 돌려 제자리로 걸어갔고, 그 뒷모습이 어쩐지 조금 전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곧게 뻗은 등,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는 그대로였지만, 어깨에 실린 힘의 종류가 아까와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는 걸 교실 안의 몇몇은 눈치챘다.
교실은 곧바로 소란스러워졌다. "저거 뭐야, 방금 그거 뭐야." 여기저기서 속삭임이 터졌고, 하늘은 눈을 크게 뜨고 준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야, 너 강서린이랑 무슨 사이야?" 그녀의 목소리에 진심 어린 놀라움이 실려 있었지만, 준호는 그저 멍하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나도 몰라... 처음 보는 앤데." 준호가 겨우 대답했지만, 목소리에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어색함이 섞여 있었다.
주변 아이들이 이런저런 추측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누군가는 예전에 같은 학원을 다닌 적이 있는지 물었고, 또 누군가는 초등학교 동창이 아니냐며 진지하게 추궁했지만, 준호는 그 어떤 물음에도 시원한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담임이 들어오면서 겨우 소란이 잦아들었지만, 아이들의 시선은 수업 중에도 몇 번이나 준호와 옆 반 창문 너머 서린의 자리를 오갔다.
조금 전 서린의 손 위에 있던 별 모양 배지의 잔상이, 이상하게도 그의 눈꺼풀 안쪽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물건이었는데도, 손끝이 저릿하게 반응하는 이 느낌은 무엇인지 준호는 알 수 없었고, 그 낯선 감각이 하루 종일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하늘이 다시 캐물었지만, 준호는 같은 대답만 반복할 뿐이었고, 정작 자신이 가장 궁금한 사람은 서린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 배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였다.
점심시간, 급식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준호는 무심코 옆 반 창문 쪽을 흘겨보았는데, 서린은 여전히 창밖을 보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앉아 있었다.
그 옆얼굴이 유난히 창백해 보였던 건 준호의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그날 아침의 일이 아직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였을까.
준호는 그 답을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 강서린이라는 이름이 더는 흥미로운 옆반 이야기로만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