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너만 모르는 봄날의 약속

3화

토요일 오후 세 시, 금강옥. 낮은 담장 너머로 기와지붕이 이어진 한옥 건물 앞에 선 준호는, 대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옷매를 다시 매만졌다. 버스에서 내려 골목을 따라 걸어오는 십 분 동안 몇 번이나 옷깃을 만졌는지 몰랐고, 셔츠 깃이 삐뚤어진 것도 아닌데 자꾸만 손이 그쪽으로 향했다. 담장을 두른 낡은 기와와 마당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된장 냄새가 유독 낯설게 느껴졌는데, 평소 익숙하게 드나들던 학교나 학원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이곳을 감싸고 있었다. "왔어?" 대문을 열고 나온 서린이 그를 발견하고는 짧게 물었다. 서린은 평소 교복 대신 단정한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학교에서 보던 그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고,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목선이 유난히 하얗게 눈에 들어왔다. "긴장할 거 없어. 그냥 밥만 먹으면 돼." 그녀가 앞장서 걸으며 던진 말에, 준호는 오히려 더 긴장이 되었다. '밥만 먹으면 되는 게 아니라, 그 집안 어른을 처음 뵙는 거잖아.'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서린의 뒷모습을 따라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당에는 작은 화단이 있었고, 그 옆으로 장독대 몇 개가 나란히 줄지어 있었는데, 오래된 물건들 특유의 손길 닿은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어서 이 집이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가꿔온 공간이라는 걸 짐작하게 했다. 마당을 지나 대청으로 들어서자, 자그마한 체구의 노년 여성이 앞치마를 두른 채 부엌에서 걸어 나왔다. "아이고, 왔구나, 왔어." 서린의 할머니는 준호를 보자마자 두 손을 맞잡으며 반가운 얼굴을 했는데, 그 온화한 표정이 낯선 준호를 오히려 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안녕하세요. 이준호입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할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그를 마루로 끌어당겼다. "그래, 그래. 얼른 앉아, 밥 먹어야지.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배고프지 않겠나." 반복되는 그녀의 말투에는 순박한 정이 배어 있었고, 준호는 그 온기에 조금씩 어깨의 힘을 풀 수 있었다. 할머니의 손은 놀랍도록 따뜻했는데, 그 손이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순간 준호는 문득 어린 시절 외할머니 댁에 갔을 때의 기억이 스치듯 지나갔다. 마루에는 이미 상다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부엌 쪽에서 국이 끓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희 할머니 음식 솜씨 좋으셔." 서린이 옆에 앉으며 작게 속삭였는데, 그 목소리에는 평소 학교에서 보이던 무심한 태도와는 다른, 은근한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밥상이 차려지는 동안, 할머니는 준호의 얼굴을 몇 번이나 다시 살펴보다가, 문득 눈시울을 붉혔다. 처음에는 그저 손님을 살피는 정도의 눈길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눈빛이 점점 깊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집요하게 준호의 얼굴 윤곽을 훑고 있었다. "많이 컸구나. 그때 그 꼬맹이가." 그녀의 중얼거림에 준호는 젓가락을 든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를... 아세요?" 그의 물음에 할머니는 옆에 앉은 서린을 흘긋 보더니, 다시 준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식탁 위로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 짧은 침묵 사이에 서린이 국그릇을 내려다보며 숨을 살짝 삼키는 것이 준호의 눈에 들어왔다. "여섯 해 전이었나, 우리 서린이가 시장에서 길을 잃었을 때, 어떤 남자애가 얘를 찾아서 데려다줬거든." 할머니가 천천히 풀어놓는 이야기에, 준호의 숨이 잠시 멈추었다. "그때 서린이가 얼마나 울었는지, 온 시장 사람들이 다 그 애 찾으려고 나섰었다. 그런데 어떤 학생 하나가 얘 손을 잡고 파출소까지 데려다줬다더구나." 할머니의 목소리는 점점 더 그리움 짙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 애가 울고 있는 서린이한테 자기 손수건이랑, 별 배지를 쥐여주면서 괜찮다고 그랬다더라. 그때 서린이가 그 배지를 얼마나 소중하게 쥐고 있었는지, 집에 와서도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해서 내가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몰라." 그녀는 그때를 떠올리며 살짝 웃음을 지었지만, 그 웃음 끝에는 옛 기억의 무게가 배어 있었다. 서린은 그 순간 시선을 내리깐 채 밥그릇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손끝이 아주 살짝 떨리고 있었다. '별 배지.' 준호의 머릿속에 그날 교실에서 본 낡은 은색 별이 떠올랐지만, 여전히 자신의 기억 속에는 그런 장면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급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는데, 여섯 해 전이라면 자신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시절이었고, 그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흐릿하게 조각나 있어서 특정한 장면 하나를 끄집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저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요." 그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할머니의 표정이 잠시 흐려졌지만 이내 다시 부드러운 웃음으로 돌아왔다. "괜찮다, 괜찮아. 어린애가 뭘 다 기억하겠어."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서린의 얼굴에는 미묘한 실망의 그림자가 스쳤다. 준호는 그 그림자를 놓치지 않았고, 그녀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어서 더욱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 애였다면... 왜 기억이 안 나는 거지.' 그는 젓가락을 든 손에 힘을 주며 속으로 되물었지만, 답이 나올 리 없었다. 할머니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이런저런 반찬을 준호의 앞으로 밀어주며 먹으라고 권했는데, 그 손길에는 여전히 순박한 정이 넘쳐서, 어색했던 자리의 분위기가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많이 먹어, 많이. 우리 서린이 친구라니까 내가 얼마나 반가운지." 할머니의 말에 서린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었지만, 그 표정에는 아까의 그림자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식사가 끝난 뒤, 서린은 준호를 마당까지 배웅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짧은 거리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고,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조용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미안, 갑자기 이런 얘기 들려드려서." 대문 앞에서 그녀가 처음으로 먼저 사과했고, 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히려... 제가 궁금해요. 그때 제가 어땠는지." 그의 대답에 서린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시선을 피했다. 그 짧은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간 감정이 무엇인지, 준호로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좀 예민하셔. 그날 이후로 오랫동안 그 얘기만 하셨거든. 그래서 나도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서린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는데, 그 말투에는 평소의 단호함과는 다른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넘어가는 게 나을까." 준호가 되물었을 때, 서린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돌려 담장 너머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못 하는 게 이렇게까지 미안한 일이었나.' 준호는 대문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그 별 배지의 무게가 자신의 손끝에 남아 있는 듯한 이상한 감각에 시달렸다. 돌아서서 걷는 골목길 위로 오후의 햇살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빛을 받으며 걷는 동안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낡은 은색 별 하나가 자꾸만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몸을 돌렸을 때, 준호는 문득 자신의 가방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는데,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손끝에는 여전히 차갑고 단단한 무언가가 만져지는 듯한 착각이 남아 있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 그는 텅 빈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미간을 좁혔고, 그 순간 문득 서린의 실망한 눈빛이 다시 떠올라 가슴 한켠이 이상하게 저릿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방금 전까지는 없던 낯선 조바심이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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