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은강고등학교 2학년 3반 복도는 어제와는 다른 온도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라면 조용히 지나갔을 등굣길이 오늘은 유난히 소란스러웠는데, 그 소란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렇듯 강서린이라는 이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강서린이 이준호에게 말을 걸었다는 소식은 밤사이 학년 전체 SNS를 타고 번져나가, 아침 자율학습 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지나가는 학생들마다 준호를 힐끗거리며 수군댔고, 몇몇은 대놓고 그의 자리 앞까지 다가와 눈을 반짝이며 캐물었다.
"야, 진짜야? 여제가 너한테 먼저 말 걸었다는 거?" 옆반 아이 하나가 다가와 대뜩 캐묻자, 준호는 손을 내저으며 자리를 피했다.
"그냥... 별거 아니었어." 그가 얼버무리며 자리에 앉는데, 등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별거 아닌데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져 있어?" 누군가의 장난스러운 말에 교실 안이 잠깐 웃음소리로 채워졌고, 준호는 괜히 책상 위 교과서를 뒤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정작 서린은 그날 아침 내내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무심함이 오히려 아이들의 상상력을 더 부추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
점심시간, 은강고 급식실.
하늘은 점심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급식판을 내려놓기도 전에 준호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내가 알기론 강서린이 남자애한테 먼저 말 건 거, 입학하고 처음이야." 그녀가 젓가락을 흔들며 말하는데, 그 눈빛에는 순수한 흥미와 약간의 걱정이 섞여 있었다.
"그것도 확실한 거야?" 준호가 미심쩍은 얼굴로 되묻자, 하늘은 자신이 알아본 정보의 출처를 나열하듯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1반 애가 그러는데, 2반 애가 그러는데, 3학년 선배가 그러는데— 아무튼 세 다리는 건너서 들은 거니까 신빙성은 있는 셋."
"세 다리면 원래 얘기가 부풀려지는 거 아니야?" 준호가 힘없이 반박했지만, 하늘은 별로 개의치 않는 얼굴로 국물을 떠먹었다.
"나도 몰라, 진짜." 준호는 국을 뜨다 말고 고개를 저었는데, 배지를 내밀며 묻던 서린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되풀이되어 밥맛이 나지 않았다.
'기억 안 나?' 그 짧은 물음이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준호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낡은 은색 별 배지, 손끝으로 만졌을 때 느껴졌던 차가운 감촉, 그리고 그것을 내밀던 서린의 표정에 스쳤던 미묘한 긴장까지, 하나같이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하늘이 휴대폰을 꺼내 뭔가를 검색하다가, 화면을 준호 앞으로 들이밀었다.
"봐봐, 이거. 강서린 할머니가 하는 식당인가 봐. '금강옥'이라고, 전통 한정식집인데 꽤 유명해." 화면에는 고풍스러운 한옥 건물 사진과 함께, 지역 방송 뉴스에 소개된 기사가 떠 있었다.
준호는 그 화면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기사 속 사진에는 단정한 한복을 입은 노년의 여성이 손님상을 살피는 장면이 담겨 있었고, 그 아래 붙은 설명에는 '삼십 년 전통, 지역 유지들 사이에서도 이름 높은 곳'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삼십 년? 그럼 저 할머니가 강서린 할머니인 거야?" 준호가 묻자 하늘은 스크롤을 더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밑에 검색해보니까, 강서린 아빠가 거기 대표이사로 있는 무슨 그룹 산하 계열사도 있더라. 정확힌 모르겠는데 아무튼 보통 집안은 아닌 거 같아."
준호는 그 기사를 읽으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는데, 서린의 집안이 생각보다 훨씬 크고 견고한 세계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저런 애가 왜 나한테.' 속으로 되뇌는 그의 표정이 복잡하게 굳어 있었다.
하늘은 그런 준호의 얼굴을 살피더니 젓가락을 내려놓고 조금 진지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진짜 배지 얘기밖에 안 물어본 거야? 뭐 다른 말은 없었어?"
"응, 그냥 배지 보여주면서 기억나냐고 물어본 게 다야." 준호가 대답하자, 하늘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이상하네. 걔 원래 그런 거 절대 안 물어보는 애인데." 그녀의 말끝에 붙은 짧은 침묵이, 준호의 마음속 불편함을 더 깊게 눌러놓았다.
***
방과 후,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갈아신던 준호의 등 뒤로 낮은 발소리가 다가왔다.
복도의 형광등 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던 그 순간, 그는 어딘가 익숙한 향수 냄새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이준호." 서린의 목소리에 놀란 준호가 뒤를 돌아보자, 그녀는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교복 재킷을 걸친 그녀의 자세는 흐트러짐 없이 곧았고, 그 서늘한 눈매는 여전히 사람을 압도하는 힘을 지니고 있어서, 준호는 순간 말을 잃고 그저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번엔 미안했어. 갑자기 이상한 거 물어봐서." 그녀의 사과는 짧고 담담했지만, 그 뒤에 붙은 짧은 정적이 뭔가를 더 말하고 싶어 하는 듯 느껴졌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준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는데, 서린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그 시선이 너무 길게 느껴진 탓인지, 준호는 괜히 신발끈을 다시 묶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근데 오늘 애들이 좀 시끄러웠죠. 그거 때문에." 그가 어색함을 지우려 먼저 말을 꺼냈지만, 서린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짧게 답했다.
"그런 건 신경 안 써." 그녀의 대답이 너무 단호해서, 준호는 오히려 그 무심함에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 그녀가 불쑥 던진 질문에 준호는 눈을 크게 떴고, 신발장 옆을 지나가던 몇몇 아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들을 느낀 준호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며 되물었다.
"주말에요? 왜, 왜요?"
"할머니가... 너 한번 보고 싶어 하셔서." 서린의 말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그 문장 끝에 아주 옅은 긴장이 묻어 있었다.
"할머니요? 저를요?" 준호가 되묻자,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강옥으로 와. 토요일 오후 세 시. 주소는 문자로 보낼게." 그녀의 말은 마치 이미 결정된 일을 통보하는 것처럼 짧고 단정했는데, 준호는 그 말투에서 반박할 여지를 찾지 못했다.
"저기, 근데 왜 하필 저를... 저는 할머니를 뵌 적도 없는데요." 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서린은 그 질문에 곧바로 답을 주지 않고 잠시 그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준호는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 뭔가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보면 알아." 서린이 그렇게만 말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준호의 속은 복잡하게 뒤엉켰지만, 서린의 눈빛이 좀처럼 물러설 기색이 없어 그는 결국 알겠다는 대답을 내놓고 말았다.
"네... 알겠어요."
그의 대답을 들은 서린의 입가에 아주 잠깐,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미세한 안도의 기색이 스쳤는데,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준호 자신조차 아니었다.
서린이 돌아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준호는 어제 그녀가 보여준 별 모양 배지를 다시 떠올렸다.
멀어지는 그녀의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준호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 배지가, 그 낡은 은색 별이,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야기의 조각이라는 확신이 조금씩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확신 뒤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마치 서늘한 그림자처럼 조용히 따라붙고 있었다.
'금강옥에 가면, 뭔가 알게 되는 걸까.' 준호는 신발장 문을 닫으며 생각했지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아직 어디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