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우리 사귄다고 해버렸다

1화

딸랑, 소리와 함께 교문을 넘어서자마자 벚꽃 잎이 안경알 위로 떨어져 앉았다. 손끝으로 툭 털어내며 걸음을 옮기는데, 운동장 가득 흩날리는 꽃잎들 사이로 낯선 얼굴들이 삼삼오오 모여 웃고 떠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저마다 짝을 지어 걷고 있었고, 나만 홀로 배정표를 손에 쥔 채 신관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새로 배정된 반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계단을 오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1학년 3반. 3층 맨 끝 교실. 숫자만 세 번쯤 확인한 끝에 종이 팻말이 붙은 교실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문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웅성거림이 유리창을 타고 전해졌고, 나는 그 소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 조금 미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얼굴들 사이에서 아는 얼굴을 찾는 일은 언제나 피곤했으므로, 나는 굳이 서두르지 않고 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몇몇 시선이 잠깐 나를 향했다가 금세 흩어졌다. 다행이었다. 관심받는 것보다는 무시당하는 게 편했으니까. 창가 자리로 걸어가 앉으며 가방을 내려놓았다. 안경 너머로 훑어본 교실 안은 낯선 이름표들로 가득했고, 칠판 옆에 붙은 좌석표를 눈으로 확인하는 척하며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아는 얼굴이 없다는 그 낯섦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혼자인 게 익숙하니까. 창밖으로 보이는 운동장 한쪽에는 늦게 핀 벚꽃 나무 한 그루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나는 그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등을 의자에 붙였다. 그런데 등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확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손바닥이 어깨뼈를 짓누르는 무게감에 몸이 앞으로 살짝 쏠릴 정도였다. "야, 이도현!" 목소리가 등 뒤에서 터졌을 때,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뒤돌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목소리 톤, 부르는 방식, 심지어 어깨를 잡는 손의 세기까지도 낯설지 않았다. 초등학교 6년 내내 옆자리에 앉았던 강태오였다. 뒤돌아보니 예전보다 훌쩍 커진 키에, 예전보다 훨씬 여유로워진 웃음을 짓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통통했던 볼살은 다 빠지고 턱선이 날카로워졌으며, 목소리도 한결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몇 년이야, 이거." 태오가 손을 내밀며 웃었고, 나는 그 손을 잡으며 짧게 "삼 년."이라고만 답했다. 손을 맞잡는 순간 태오의 손바닥에서 낯선 온기가 느껴졌는데, 어릴 때 느꼈던 그 온기와는 조금 다른, 더 단단하고 더 어른스러운 감촉이었다. 아버지의 해외 근무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외국으로 나갔던 태오였다. 몇 번 문자를 주고받았을 뿐, 얼굴을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어색함이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귀국한 지는 얼마 안 됐어. 아버지가 이번엔 한국에서 계속 일하시기로 했거든." 태오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지만, 나는 그 말 속에 오랜 시간 떠돌았던 아이의 흔적 같은 게 묻어있다는 걸 느꼈다. 몇 개국을 옮겨 다녔다는 얘기를 지나가듯 흘리면서도, 눈빛에는 어딘가 지친 기색이 스쳤다. 말투는 여전히 밝았고, 이미 주변 몇몇 아이들과도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저건 정치인이지, 정치인. 삼 년 만에 다시 봐도 여전했다. 초등학교 때도 반장 선거만 나가면 무조건 당선이었던 애였으니까. "넌 그대로네. 안경도 그대로고." 태오가 내 안경다리를 손끝으로 살짝 건드리며 웃었다. "여전히 말 없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할 말이 없는 거야." 나는 무심하게 대꾸했고, 태오는 그 말에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담임이 들어오고 자리 배치가 끝난 뒤, 출석부를 부르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름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아이들은 "네." 하고 짧게 대답했고, 나도 내 이름이 불렸을 때 손을 들지 않고 짧게 대답만 했다. 담임은 자기소개랍시고 몇 마디를 늘어놓았지만 나는 절반도 듣지 않았다. 새 학년 새 학기, 다 비슷한 소리였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태오는 벌써 반 아이들 절반과 이름을 트고 있었다. 누구는 축구 얘기로, 누구는 게임 얘기로 순식간에 말을 섞으며 웃음소리를 만들어내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벚꽃이 바람에 흔들리며 흩날리는 풍경 속에서, 낯익은 실루엣 하나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눈에 익어서, 나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윤서아였다. 중학교 때 다니던 학원에서 만난 아이였다. 그때의 서아는 늘 구석 자리에 앉아 문제집만 들여다보던, 말수가 적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아이였다. 유치원 때부터 같은 학교였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을 정도로, 존재감이랄 게 없었던 아이. 연락처를 교환한 것도 학원 마지막 날 우연히 같은 조가 되어서였을 뿐, 그 뒤로 문자 몇 번 주고받은 게 전부였다. 새해 인사 정도, 시험 잘 봤냐는 안부 정도. 그마저도 언제부턴가 뜸해졌었다. 그런데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는 서아는,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어깨를 펴고 걷는 자세, 눈에 확 들어오는 밝은 표정, 주변 아이들과 스치듯 눈을 마주치며 짧게 웃어 보이는 여유까지. 걸음마다 치마 끝이 살짝 흔들렸고, 머리카락은 어깨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예전보다 키도 자란 것 같았고, 무엇보다 표정이 살아있었다. 뭐가 저렇게 바뀐 거지. 나는 안경다리를 슬쩍 밀어 올리며 그 변화를 눈으로 좇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문 쪽으로 걸어 나가는데, 마침 복도에 서 있던 나를 서아가 먼저 발견한 모양이었다. "어, 이도현!"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걸음이 가벼웠다. 목소리마저 예전보다 한 톤 높고 경쾌했다. "같은 반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3반."이라고만 답했다. 그러자 서아가 눈을 크게 뜨며 웃었다. "나도! 진짜 반갑다." 그 웃음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 나는 잠시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고 말았다. 예전 같았으면 저렇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 애가 아니었는데. "뭐야, 아는 사이야?" 태오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끼어들었고, 나는 짧게 "학원에서 만난 애."라고 소개했다. 그 순간 서아의 시선이 태오의 얼굴 위에서 멈췄다. 미묘하게 굳어진 그 표정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눈동자가 살짝 커지더니, 뺨이 서서히 붉어지는 게 보였다.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손짓도 조금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저기…… 혹시 초등학교 때, 은성초 다녔어요?" 서아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태오는 잠시 기억을 더듬는 얼굴을 하다가 이내 밝게 웃었다. "어? 맞아, 은성초! 너도 거기 다녔어?" "저, 3학년 때 전학 갔었는데……" 서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태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를 떠올리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 순간 서아의 얼굴에 스치듯 지나간 표정을, 나는 미묘하게 읽어냈다. 반가움과 긴장, 그리고 오래 묵혀둔 무언가가 한꺼번에 떠오른 듯한 얼굴이었다. 콧잔등이 살짝 시큰거리는 것처럼 미세하게 떨리는 그 얼굴을 보면서, 나는 문득 이상한 예감이 스치는 걸 느꼈다. 저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시간이 있었다는 걸, 그 짧은 몇 초 동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아이들이 하나둘 교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서아는 여전히 태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태오는 아직 뭔가를 기억해내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뭔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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