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부터 서아는 학교에서 아예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복도에서 스치듯 지나칠 때조차 서아는 고개를 홱 돌려 반대편 창밖을 바라봤고, 그 뒷모습이 마치 문을 쾅 닫아버린 방처럼 단호했다. 급식실에서 우연히 마주 앉게 됐을 때는 젓가락질 몇 번 하고는 그대로 식판을 들고 자리를 옮겨버렸다. 그 짧은 순간, 서아의 어깨가 움찔하는 걸 봤다.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게 오히려 더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태오와는 여전히 어색한 사이가 이어졌다. 예전 같으면 아무 말 없이도 어깨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걸어오던 애였는데, 이제는 눈이 마주치면 먼저 시선을 피하는 쪽은 태오였다. 반 분위기마저 미묘하게 뒤틀려버린 것 같았다. 누가 딱히 말을 옮긴 것도 아닌데, 아이들 사이에서 뭔가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는 걸 감지한 눈빛들이 종종 나를 스쳐 지나갔다. 이 모든 게 내가 던진 한마디 거짓말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 며칠이 지나도록 목덜미를 짓누르는 돌덩이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밤마다 이불 속에서 그날의 장면을 되짚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왜 서아의 감정을 내 멋대로 재단해서 태오 앞에서 방패막이로 세워버렸을까. 후회는 늦은 밤일수록 더 선명해져서, 나는 몇 번이나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갑자기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죽을 것 같아.
일주일이 지나서야 나는 다시 서아와 마주칠 기회를 얻었다. 학교 축제 준비 위원으로 우연히 같은 조에 배정된 것이었다. 명단이 붙은 게시판 앞에서 서아의 이름과 내 이름이 나란히 적힌 걸 확인했을 때, 손끝이 저릿하게 떨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방과 후 텅 빈 미술실에서, 서아와 나는 나란히 앉아 현수막 시안을 만들고 있었다. 창밖으로 노을이 스며들어 미술실 바닥에 길게 붉은 그림자를 그렸고, 물통에 담긴 붓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침묵을 겨우 메웠다. 서아는 스케치북 위에 선을 긋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는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나는 몇 번이나 말을 걸려다 그만두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자꾸만 도로 삼켜졌다.
"저번에 한 말, 계속 생각했어."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스스로도 낯설게 들렸다. "네 감정을 함부로 판단한 거, 그건 진짜 잘못한 거였어."
서아는 붓을 든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눈빛에 여전히 상처가 남아 있었지만, 조금은 누그러진 기색도 있었다. 그 눈을 마주 보는 게 힘들어서 나는 자꾸 시선을 스케치북 쪽으로 떨어뜨렸다.
"그럼 왜 그런 말을 한 건데." 서아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진짜로. 그냥 궁금해서."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가 상처받을까 봐 그랬어. 태오한테 직접 고백했다가 거절당하면, 그게 더 아플 것 같아서. 그런데 그게 오히려 너한테 더 큰 상처를 준 거지." 말을 뱉으면서, 나는 스스로도 그 판단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다. 마치 내가 서아의 마음을 대신 정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는 걸, 이제야 제대로 느낀 것이었다.
서아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붓을 만지작거렸다. 붓끝에 남은 물기가 스케치북 위로 톡, 톡 떨어져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애는 끝나도 우정은 남는다는 말, 나도 이해는 해. 근데 그게 지금 이 순간의 내 감정까지 무시할 이유는 안 되는 거잖아." 서아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나도 알아. 태오가 나 안 좋아하는 거. 근데 그거랑, 내가 그 마음을 직접 전할 기회조차 없이 네가 대신 정리해버린 거는 다른 얘기잖아."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서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맞아. 그건 내가 틀렸어."
정적이 흘렀다. 창밖에서 축구부가 훈련하는 소리, 공이 튀어 오르는 소리가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왔다. 서아는 손끝으로 눈가를 슬쩍 훔치고는 다시 붓을 들었다.
"이제 와서 이런 얘기 해봤자 뭐가 바뀌겠어." 서아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사과는 받아줄게."
나는 그제야 조금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며칠 동안 목에 걸려 있던 가시 하나가 겨우 빠져나가는 느낌.
그때 미술실 문이 벌컥 열리며 태오가 들어왔다. 문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야, 여기서 뭐 해?" 밝은 목소리였지만, 서아를 발견하자마자 살짝 어색한 기색이 스쳤다. 서아 역시 순간 몸이 굳는 게 보였다. 방금까지 풀려 있던 어깨가 다시 뻣뻣하게 굳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을 느끼며, 이번에는 뭔가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처럼 함부로 입을 놀려서 일을 더 크게 만들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태오야, 저번에 내가 한 말 사실 아니었어. 나랑 서아, 사귀는 거 아니야. 그날은 그냥…… 순간적으로 잘못 말한 거야." 나는 두 사람 앞에서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이번엔 도망치지 않고, 눈을 마주 보면서.
태오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나를 쳐다봤다. "그건 이미 들었지." 그리고는 서아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서아, 나한테 뭔가 할 말 있었던 거야?"
그 질문에 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손에 쥐고 있던 붓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온몸의 핏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걸 다시 직감했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이런 자리에서 물어볼 문제가 아니었는데.
"그, 그런 거 아니야." 서아가 겨우 말을 뱉었지만,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은 여전히 스케치북 모서리를 꽉 움켜쥔 채였고, 그 손등에 핏줄이 하얗게 도드라졌다. 태오는 별생각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다른 얘기를 꺼냈지만, 서아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원망과 배신감이 뒤섞인,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입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는 입술 사이로는 아무 말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너 때문에 다 망가졌어." 미술실을 나서기 직전, 서아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몸을 돌려 나를 향해 손을 들었다.
짝, 하는 소리가 미술실 안을 갈랐다.
뺨이 화끈거리는 통증보다도, 서아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는 게 더 아팠다. 서아는 손을 떨며 나를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미술실을 뛰쳐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고, 그 뒤로 서아의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점점 멀어지다 완전히 사라졌다.
태오는 놀란 얼굴로 나와 서아가 사라진 문 쪽을 번갈아 쳐다봤다.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그대로 바닥에 내려놓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야, 이도현. 무슨 일이야, 진짜." 태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어조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얼얼한 뺨을 손으로 감싸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뺨보다 가슴 안쪽이 훨씬 더 뜨겁게 타올랐다.
이제 정말,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서버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