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왕따 선배, 사실은 오빠

1화

칠판 앞에 선 담임의 말이 웅웅거리며 흩어졌다. 이도현은 창가 자리에서 턱을 괴고 있었다. 창밖으로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구름을 보는 것도 이제는 습관이었다. 교실 안 공기는 언제나 그를 투명인간처럼 스쳐 지나갔다.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누구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게 벌써 반년째였다. 처음엔 낯설었다. 누구도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 누구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편해졌다. 아니, 편해졌다고 스스로에게 세뇌시켰다. 담임이 칠판에 뭔가를 적었다. 분필 긁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도현은 그 소리를 배경음처럼 흘려들으며 문제집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의자 끄는 소리, 웃음소리, 발소리가 뒤섞여 순식간에 교실이 텅 비었다. 도현은 자리에 남아 문제집을 펼쳤다. 펼쳤다기보다는, 펼쳐 놓은 채로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그때 책상 위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분홍색 쪽지였다. 접힌 모서리가 정갈했다. 도현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 누가 던진 거지.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는, 아무도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쪽지를 펼쳤다. '이도현, 오늘 방과 후에 옥상으로 와줄 수 있어?' 손글씨는 단정했다. 동그란 'ㅇ'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종이에서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 살구 같기도 하고, 복숭아 같기도 한 냄새였다. 도현의 심장이 순간 덜컥 뛰었다. '설마.' 고개를 들었다. 한유리가 저 앞자리에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반에서 가장 예쁘다는, 아니 학교 전체에서 가장 예쁘다는 아이였다. 긴 생머리가 창으로 들어온 햇빛에 반짝거렸다. 그녀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어 보였다.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조심스러운 웃음이었다. 뺨이 붉어지는 게 아니라 얼굴 전체가 뜨거워졌다. 목덜미까지 열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왜, 왜 나한테……' 심장이 쿵쿵거렸다. 귀가 먹먹해졌다. 손에 든 쪽지가 땀에 젖어드는 것 같았다. 이런 일은 여태 한 번도 없었다. 반년 동안 존재하지 않는 아이처럼 지내던 그에게, 갑자기.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그것도 그토록 눈부신 사람이.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뒤엉켰다. '혹시 나를 계속 지켜봤던 걸까.' '아니, 그럴 리가.' '그럼 왜.' 생각은 답을 찾지 못한 채 계속 맴돌기만 했다. 그때 교실 뒤편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낮게 깔린,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박준혁이 팔짱을 낀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옆에는 한유리의 친구들 몇 명이 서서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한 명은 아예 책상에 엎드려 어깨를 떨고 있었다. "야, 진짜 받아 든다." "완전 순진하네." "저거 봐, 얼굴 빨개진 거." "눈까지 촉촉해진 거 아니야?" 도현의 손끝이 서서히 굳었다. 쪽지를 쥔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방금 전까지 뜨겁던 얼굴이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차갑게 식어갔다. '또냐.' 가슴 안쪽에서 뭔가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바닥이 없는 곳으로 추락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뭐야."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스스로도 낯선 소리였다. "뭐긴 뭐야, 장난이지." 박준혁이 성큼 다가와 그의 앞에 섰다. 키가 도현보다 한 뼘은 더 컸다. 그늘이 도현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유리가 너 좋다고 할 것 같았냐?" 말투에는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마치 도현이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한 것 자체가 우습다는 듯이. 한유리가 그제야 웃음기를 지우고 무표정하게 이쪽을 보았다. 연기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방금 전까지의 다정한 미소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연기 잘하네, 나름." 그녀가 짧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높은 구두 소리가 타박타박 멀어져 갔다. 도현의 관자놀이가 뻐근하게 조여왔다. 귀 뒤로 뜨거운 피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숨이 턱 막혔다가, 억지로 뱉어내는 느낌으로 흘러나왔다. 주변에 있던 몇 명이 여전히 웃고 있었다. 누군가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어디 올라가겠지.'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속이 뒤틀렸다. "방과 후에 옥상으로 오라고 했는데." 박준혁이 쪽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종이가 도현의 책상 위에서 팔락, 흔들렸다. "안 갈 거야?" "……갈 이유 없잖아." 목소리를 최대한 차분하게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이유는 우리가 만들어줄게." 그가 씩 웃었다. 뒤에 서 있던 두 명이 슬며시 웃음을 삼켰다. 한 명은 팔뚝을 우두둑, 소리 내며 풀었다. 전형적인 예고였다. 도현은 그 웃음 안에 담긴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반년 동안 수도 없이 겪어온 종류의 웃음이었으니까. 방과 후, 도현은 결국 학교 뒤편 골목으로 끌려갔다. 정확히는 끌려간 것처럼 보이도록 걸어갔다. 누가 보면 순순히 따라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걸음 하나하나에는 계산이 섞여 있었다. 골목 안은 낮인데도 그늘이 짙었다. 담벼락에 걸린 이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닥에는 낡은 담배꽁초 몇 개가 뒹굴고 있었다. 멀리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지나갔다가 사라졌다. 박준혁과 두 명이 그를 둘러쌌다. 삼각형 모양으로, 도망칠 틈을 없애는 배치였다. "오늘은 얌전히 있을 거지?" 한 명이 어깨를 툭 밀쳤다. 장난스러운 손짓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도현은 뒤로 살짝 밀렸다가 균형을 다시 잡았다. 발바닥에 닿는 아스팔트의 질감이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리에 힘이 실렸다. 무릎이 살짝 굽혀졌다. 호흡이 얕고 빠르게 변했다. 겉으로는 여전히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다. 어깨는 움츠러들고, 시선은 바닥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겁먹은 토끼처럼 보였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침착하게 세 사람의 위치를 훑고 있었다. 왼쪽, 오른쪽, 정면. 거리, 체중 이동, 시선의 방향까지. '왼쪽부터.' 머릿속에서 짧은 계산이 끝났다. 숨을 얕게 들이마셨다. "야, 뭐 그렇게 쫄았어." 가운데 있던 한 명이 낄낄거렸다. "이러다 오줌 지리는 거 아니냐." 다른 한 명이 맞장구를 쳤다. 셋 다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반년 동안 단 한 번도 반항해본 적 없는 상대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을 테니까. 박준혁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옷깃을 잡으려는 손짓이었다. 느긋했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손짓이었다. 그 손끝이 도현의 옷깃에 닿기 직전, 도현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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