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골목은 좁았다.
양쪽으로 늘어선 낡은 담벼락 사이, 저물어가는 햇빛이 비스듬히 스며들었다.
손이 옷깃에 닿기 직전, 도현의 몸이 반사적으로 비틀렸다.
어깨가 살짝 낮아지며 박준혁의 팔이 허공을 스쳤다.
"뭐야."
박준혁의 눈이 커졌다.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스쳤다가 곧 짜증으로 바뀌었다.
도현은 그 틈에 반걸음 물러섰다.
등이 벽에 닿았다.
차가운 벽돌 표면이 셔츠 너머로 느껴졌다.
퇴로는 없었지만, 최소한 정면은 확보했다.
'셋.'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왼쪽, 오른쪽, 그리고 박준혁.
거리와 각도가 저절로 계산되었다.
언제부터 이런 걸 생각하는 버릇이 들었는지, 도현 자신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왼쪽에 있던 남자애가 팔을 뻗었다.
도현은 몸을 낮추며 그 팔 아래로 미끄러졌다.
운동화 밑창이 아스팔트를 긁으며 짧게 마찰음을 냈다.
순식간에 위치가 바뀌었다.
세 사람이 순간 서로 뒤엉키며 균형을 잃었다.
"이 새끼 뭐야, 갑자기."
박준혁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섞였다.
평소 여유롭게 웃던 얼굴이 아니었다.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세를 낮추고 숨을 고르게 쉬었다.
심장은 이미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표정을 만드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몇 년 만이지.'
오래전, 어떤 이유로 몸에 새겨 넣었던 감각이었다.
지금은 그저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감각.
설명할 필요도 없었고,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랑 똑같네.'
숨을 죽이고, 발끝에 힘을 주고, 상대의 시선이 아닌 어깨의 움직임을 읽는 것.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오른쪽 남자애가 다시 다가서려는 순간, 골목 반대편에서 자전거 벨소리가 울렸다.
따르릉, 짧고 경쾌한 소리였다.
지나가던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중년 여성 하나가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흘긋거렸다.
"쳇."
박준혁이 짧게 혀를 찼다.
주위를 살피는 눈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다음에 보자, 이도현."
말투에는 여전히 여유를 가장한 티가 남아 있었지만, 눈빛에는 방금 전의 자신감이 사라지고 없었다.
세 사람이 몸을 돌려 사라졌다.
운동화가 아스팔트를 딛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도현은 그 자리에 서서 무릎에 손을 짚었다.
숨이 거칠게 몰아쳤다.
어깨가 들썩거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시는 안 걸릴 줄 알았는데.'
한참 동안 그 자세로 있었다.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지만, 손끝의 떨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도 이상했다.
싸움은 피했고, 다친 곳도 없었다.
그런데도 몸이 계속 예전의 감각을 붙잡고 있었다.
'그만 생각해.'
도현은 고개를 흔들고 몸을 일으켰다.
가방을 다시 고쳐 메고 걸음을 옮겼다.
골목을 빠져나와 도로변을 걷는 내내 심장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그 모든 게 평소보다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하늘 끝이 주홍빛으로 번져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주택가 골목 어귀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놔요! 이거 놔요!"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날카롭고 겁에 질린 소리였다.
도현의 발이 먼저 그쪽으로 향했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어둑한 담벼락 옆, 한 남자가 소녀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남자의 손에는 낡은 지갑이 들려 있었다.
술 냄새가 멀리서도 느껴질 만큼 진했다.
"가방 안 내놓으면 이거 못 돌려줄 줄 알아."
남자의 목소리는 걸걸했고, 눈빛은 흐릿했다.
소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흔들렸다.
초록빛 눈동자가 겁에 질려 있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지,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도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던졌다.
남자의 팔을 잡아채며 소녀를 뒤로 밀었다.
남자가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술기운 때문인지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뭐야 넌."
남자의 눈이 도현을 향해 험악하게 좁혀졌다.
"놓으세요."
짧고 낮은 목소리였다.
방금 전 골목에서와는 다른, 조금 더 단단한 목소리였다.
남자는 도현의 눈빛에서 뭔가를 느낀 듯 멈칫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갑이 바닥에 떨어졌다.
소녀가 그걸 재빨리 주워 들었다.
손이 떨려 지갑을 두 번이나 놓쳤다가 겨우 움켜쥐었다.
"됐어요, 됐으니까 그만……"
남자는 짧게 욕설을 내뱉고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비틀거리며 멀어졌다.
정적이 흘렀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한 번 들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도현은 숨을 몰아쉬며 소녀를 돌아보았다.
소녀는 여전히 몸을 떨고 있었다.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안은 채였다.
"괜찮아요?"
"네…… 네, 괜찮아요."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아직 떨리고 있었다.
젖은 눈동자 위로 저녁 빛이 어렸다.
겁먹은 토끼 같은 눈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녀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숙일 때마다 갈색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도현은 어색하게 손을 저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감사 인사를 받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괜찮으면 다행이고요."
"이름이라도……"
소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눈빛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었지만, 그 사이로 궁금함이 섞여 있었다.
"됐어요. 어서 집에 가요, 늦었으니까."
도현은 짧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하루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피곤했다.
뒤에서 소녀가 뭐라 더 말을 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아스팔트를 두드렸다.
소녀는 그 자리에 잠시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 실루엣이 점점 작아졌다.
그러다 이내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운동화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헤어졌다.
그날 저녁, 도현은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손이 아직 조금 무거웠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 뒤섞여 있었다.
낯선 신발 두 쌍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작은 여성용 구두, 다른 하나는 조금 더 작은 운동화였다.
도현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누구지.'
평소 이 집에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왔니, 도현아."
아버지 이정호의 목소리가 유난히 들떠 있었다.
평소보다 한 톤 높은, 어딘가 조심스러운 그런 목소리였다.
거실 소파에는 처음 보는 여자와, 그 옆에 앉은 소녀 한 명이 있었다.
여자는 단정한 옷차림에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긴장이 묻어 있었다.
소녀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았다.
갈색 머리카락.
초록빛 눈동자.
도현의 숨이 그대로 멈춰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