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선배, 내일도 올게요

1화

자정이 가까운 시각, 나는 편의점 봉투를 든 채 계단을 올랐다. 봉투 안에서 캔 맥주와 삼각김밥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3층 복도에 들어서자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리며 낮은 소음을 냈다. 지지직, 지지직.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질 만큼 복도는 조용했다. 그리고 그 아래, 옆방 문 앞에 누군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처음엔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림자가 뭉쳐 있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그 형체를 살폈다.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채, 긴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있었다. 카디건 하나만 걸친 어깨가 조금씩 오르내렸다. 숨을 쉬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다가갔다. "저기요." 말을 걸자 그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을 알아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국문학과 서은채. 한강대학교 안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강의실에서 스쳐 지나갈 때마다 뒤돌아보는 사람들, 그 시선의 중심에 항상 있던 얼굴. 동기들 사이에서도, 선배들 사이에서도 심심하면 오르내리는 이름이었다. '서은채랑 같은 강의 듣는다며. 부럽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 그 얼굴이,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눈가가 붉게 부어 있었다. "어···. 옆방 분이시죠."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열쇠를 잃어버려서···. 전화도 꺼졌고···." 말끝이 흐려지며 손끝으로 무릎을 문질렀다. 손톱 끝이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준 채였다. "관리실은 이 시간에 아무도 없고···. 그냥, 좀 앉아 있었어요." 그 순간, 나는 그냥 지나칠까 생각했다. 피곤했고, 늦었고, 남의 일에 끼어들 생각도 없었다. 내일 아침 일찍 강의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새어 나오는 복도, 얇은 카디건 하나만 걸친 몸. 11월 밤, 복도 바닥은 차가웠을 것이다. 나는 결국 손을 내밀었다. "일단 들어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내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있었다. 체온이 낮았다. 놀랄 만큼. 손끝이 얼음장 같았고, 잡은 팔 전체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그녀를 들여보낸 뒤, 나는 잠시 문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방 안, 그녀는 어색하게 소파 끝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딱 붙이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그 자세가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마치 남의 집에 처음 온 사람처럼,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러운 자세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냉장고를 열었다. 계란, 밥, 케첩, 그리고 어제 사둔 다진 고기 조금. 특별한 재료는 아니었지만, 손은 익숙하게 움직였다. 칼끝으로 양파를 다지는 동안, 그녀의 시선이 등 뒤에 닿아 있다는 걸 느꼈다. "저···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됐고." 짧게 대답하자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밥을 볶는 동안, 그녀는 조용히 방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책장, 벽에 걸린 시계, 책상 위 정리된 필기구들. 시선이 하나씩 옮겨 다니는 게 유리창에 흐릿하게 비쳤다. 그 시선이 마지막으로 나에게 닿았을 때, 나는 못 본 척 계란을 풀었다. "···잘 부탁드려요." 작은 목소리였다. 뭘 부탁한다는 건지 되묻지 않았다. 계란을 얇게 부쳐 밥 위에 덮는 손이, 평소보다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십 분쯤 지나 오므라이스 한 그릇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노란 계란 위에 케첩으로 대충 그은 선 하나. 장식이라기보단 그냥 습관이었다. 그녀가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눈이 커졌다. "···맛있어요." 숟가락을 쥔 손이 조금씩 빨라졌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눈꼬리가 살짝 휘어졌다. 한 숟갈, 두 숟갈, 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굶은 사람처럼 그릇을 비워갔다. 가끔씩 물을 마시고,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식탁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그 표정 하나에, 이상하게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나는 왜 이런 반응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밥을 먹는 여자애 하나를 보고 있을 뿐인데. 그런데 자꾸 눈이 갔다. 숟가락을 입에 넣을 때마다 움직이는 입술, 만족스럽게 감기는 눈꺼풀. 목덜미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닥. 나는 애써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창밖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어두운 옆 건물 벽뿐이었는데도, 나는 한동안 그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요." 그녀가 숟가락을 든 채로 물었다. "이거 이름이 뭐예요? 그냥 오므라이스는 아닌 것 같은데." "이름 없어." "음식에 이름이 왜 없어요." "내가 만드는 건데 내가 이름 안 지으면 없는 거지." 그녀가 픽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복도에서 웅크리고 있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그 웃음을 보다가, 나는 또 시선을 피했다. 그릇이 비워질 때쯤, 그녀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저기요." "···." "내일도 올게요." 뜬금없는 선언이었다. 숟가락을 놓은 손이 어느새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작고 차가운 손이었다. "네?" 내가 되묻자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오늘 되게, 오랜만에 뭘 다 먹었어요." 그녀가 그렇게 덧붙였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 말만은 또렷했다. 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손을 빼야 한다는 생각과, 그냥 두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그 손의 온기가 조금씩 올라오는 걸 느끼고만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갈 때, 나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문 앞에서 그녀가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잘 먹었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옆방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작게 들렸다. 그날 밤, 나는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벽 너머, 옆방에서 나는 옷 스치는 소리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벽을 바라봤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가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자꾸 의식됐다. 도대체, 서은채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한 걸까. 내일도 온다는 게, 정말로 내일도 이 문을 두드린다는 뜻일까. 나는 그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한 채로, 벽 너머의 작은 기척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정말로 그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