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선배, 내일도 올게요

5화

그날 오후, 나는 정우와 함께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햇살이 여전히 눈부셨다. 낙엽 구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오후였다. "쪽지 붙은 거 봤어?" 정우가 느닷없이 물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어떻게 알아." "복도에 그거 뻔히 보이던데." 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캔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맛이 유독 쓰게 느껴졌다. '은채, 너 조심해.' 누가 붙였는지도 모르는 그 쪽지 한 줄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뭐라고 써 있었는데." 정우가 궁금한 눈으로 다시 물었다. "몰라." "몰라? 봤다며." "봤는데, 신경 안 써." 거짓말이었다. 정우는 캔을 흔들며 나를 흘겨보다가, 이내 관심을 접었다. "저녁에 비 온다더라. 우산 챙겨." "안 온대." "온대. 나 방금 봤어."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 그때는 정우의 말을 믿지 않았다. - 그날 저녁,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예보에도 없던 소나기였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순식간에 방 안을 채웠다. 투둑. 투둑.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정우 말이 맞았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텅텅 비어 있었다. 계란도 없고, 우유도 없고, 먹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우산을 챙겨 마트로 향했다. 장 볼 게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비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흙냄새와 섞인 축축한 공기였다. 우산을 펴는 손끝이 조금 젖었다. 골목을 걸어가는 동안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빗방울이 은빛으로 부서졌다. 그런데 마트 앞 골목에서, 우산도 없이 서 있는 은채를 발견했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가로등 아래, 비에 흠뻑 젖은 채 서 있는 그녀의 실루엣이 낯설게 느껴졌다. "···뭐 해."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우산을 안 챙겼어요." 비가 더 굵어지고 있었다. 빗물이 그녀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잠시 우산을 든 손에 힘을 줬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인사만 하고 마트로 들어가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우산을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가자." 짧은 말이었다. 그녀가 나를 잠깐 올려다보더니, 조심스럽게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둘이 걷기엔 좁은 우산이라, 어깨가 자꾸 부딪혔다. 나는 우산대를 최대한 그녀 쪽으로 기울이려 했지만, 그럴수록 내 어깨가 비에 젖었다. 그녀가 그걸 눈치챘는지 슬쩍 몸을 붙였다. 그때마다 그녀의 팔 안쪽 살이 내 팔에 닿았다. 체온이 이상하게 뜨거웠다. 비 때문에 서늘한 공기 속에서, 유독 그 지점만 뜨겁게 느껴졌다. 나는 애써 다른 곳을 봤다. 가로등, 젖은 아스팔트, 저 멀리 편의점 간판. 무엇이든 그녀 얼굴만 아니면 됐다. "저기, 오늘 주말 약속···."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안 갔어?" "안 갔어요." "왜." "그냥, 가고 싶지 않아서요."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무너뜨렸다. 나는 그 이유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묻는 순간, 뭔가 무너질 것 같아서 그만뒀다. '그냥, 가고 싶지 않아서요.'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남았다. 혹시 나 때문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자꾸 그 생각이 드는 걸까. 골목을 벗어나 건물 입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그녀가 발을 헛디디며 몸이 기울었다. 빗물에 젖은 보도블록이 미끄러웠던 모양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아졌다. 숨결이 닿을 만큼. 비에 젖은 머리카락 몇 갈래가 그녀의 얼굴에 붙어 있었다. 그 순간, 시간이 잠깐 멈춘 것 같았다. 빗소리마저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속눈썹에 매달린 물방울 하나가 떨어질 듯 말 듯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물방울을 눈으로 좇다가, 다시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미안." 나는 그녀를 놓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손을 놓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끝이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녀도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은 어느새 옆으로 기울어져 둘 다 반쯤 젖은 채였다. 빗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처럼 보였지만, 그냥 비였다. 그녀의 눈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 안에 흔들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못했다. 심장이 이상하게 크게 뛰었다. 쿵. 쿵. 쿵. 그녀도 내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골목 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채 씨?" 차현수였다. 우산을 쓴 채, 그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빗속에서도 그의 걸음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놀란 눈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보는 그 시선에, 나는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손을 떼야 했다. 그런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은채도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살짝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늦은 뒤였다. 현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두 분···, 무슨 사이예요?" 현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비가 여전히 두 사람 사이로 쏟아지고 있었다. 은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나를 올려다본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사이냐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하는 걸까. 친구, 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현수의 우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발밑으로 튀었다. 그는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는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 시선이 더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현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답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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