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선배, 내일도 올게요

2화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삼십 분 일찍 눈을 떴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잠이 깼을 뿐이다. 천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창밖으로 옅은 안개가 걸려 있었고, 나는 괜히 이불을 갈지도 않은 채로 그대로 개켜 넣었다. 세수를 하면서도 자꾸 손끝에 남은 감각이 신경 쓰였다. 어제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의 온도. 차가웠는데, 이상하게 그 차가움이 오래 남았다. 씻고 나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별생각 없이 다시 닫았다. 아침은 늘 거르는 편이었으니까. 강의실로 향하는 길, 캠퍼스 벤치 근처에서 무리 지어 선 남학생들이 한 방향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서은채가 걸어가고 있었다. 하얀 니트에 단정한 스커트,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그 걸음걸이가, 어제 밤 복도 바닥에 웅크려 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저 선배 봤어? 국문학과 여신 지나간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스쳤다. "말도 안 걸어본 사람이 태반이라던데." 다른 목소리가 거들었다.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도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서은채가 지나가는 방향과 내가 가는 방향이 잠깐 겹쳤다가, 곧 갈라졌다.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봤어도 모른 척했을지도 모른다. 강의 세 개를 듣는 내내,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자꾸 끼어들었다. 교수님의 말소리가 웅웅거리는 배경음처럼 흘러갔다. 노트에는 필기 대신 의미 없는 선들만 그려져 있었다. 어제 그 손의 온도, 그리고 그 말. 〈내일도 올게요.〉 그저 지나가는 말이었을 거라고, 나는 애써 결론을 내렸다. 사람은 다 그렇게 말한다. 지켜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순간의 온기로 던지는 말들. 그녀 같은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의 방을 다시 찾을 리는 없었다. 세 번째 강의가 끝날 무렵, 나는 스스로에게 조금 짜증이 났다. 이런 걸로 하루 종일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가방을 챙기며 애써 그 생각을 밀어냈다. 저녁 여덟 시, 나는 자취방 부엌에서 라면 물을 올리고 있었다. 가스불 위에서 냄비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좁은 방 안을 채웠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 똑. 가벼운 두 번의 소리. 나는 손에 든 나무 주걱을 냄비 가장자리에 걸쳐두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기대는 아니었다. 아니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잠시 숨이 멎었다. "안녕하세요." 서은채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제와 똑같은 얼굴, 하지만 오늘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옅은 립 컬러 하나가 얼굴 전체의 인상을 다르게 만들었다. 그 웃음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진짜 왔네."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안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보통은···." "저는 한 번 한 말은 지켜요." 단호한 말투였다.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았다. 낮에 캠퍼스에서 스쳐 지나갔던 사람과, 지금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다시 겹쳐지지 않았다. 똑같은 얼굴인데도 어딘가 다른 사람 같았다. 나는 결국 문을 더 넓게 열었다. "뭐 먹을 거야." "어제 그거요." "오므라이스?" "네."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메뉴가 하나밖에 없는 줄 아나." "맛있었어요." 그 대답에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하고 부엌으로 돌아섰다. 그날 저녁도 나는 계란을 풀고 밥을 볶았다. 프라이팬 위에서 밥알이 튀는 소리, 기름이 튀는 소리가 좁은 부엌을 채웠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방 안을 둘러보다가, 벽에 붙은 시간표를 발견했다. "이도현. 3학년 복학생이네요." "···왜 이름을 확인해." "신기해서요. 3년째 자취라니." "신기할 게 뭐가 있어." "보통은 부모님이 자취 오래 두시는 걸 안 좋아하잖아요." 그 말에 나는 대답 대신 프라이팬을 흔들었다. 계란물이 노릇하게 익어가는 소리에 그녀의 말이 잠깐 묻혔다. "저기,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 "매번 이렇게 요리 잘해요? 아니면 저한테만 이렇게 해주는 거예요?" "···매번 이래." "에이." 그녀가 짧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방 안에 낯설게 울렸다. 밥을 다 먹은 뒤, 그녀는 접시를 개수대에 직접 가져다 놓았다. "이런 거 안 해도 되는데." "습관이에요." 그녀는 또다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내일도 올게요." 그 말이 반복될 때마다, 심장 어딘가가 조금씩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문이 닫히고,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복도의 센서등이 깜빡이며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그 불빛 속에서 나는 아직도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야, 이도현." 복도 끝에서 박정우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같은 학과 동기이자, 자취촌에서 유일하게 내 방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녀석이었다. "뭐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방금 계단 올라왔는데, 방금 그 여자··· 국문학과 서은채 아니냐." 정우의 눈이 반짝였다. "뭐냐 너, 둘이 무슨 사이야?" "아무 사이 아니야." "아무 사이도 아닌데 매일 밥을 해준다고?" "어제 처음 봤어." "어제 처음 본 사람한테 밥을 왜 해줘." 말이 막혔다.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없었다. "···열쇠를 잃어버렸었어." "그래서?" "그래서 밥 한 끼 먹인 거고." "그런데 왜 오늘도 왔어?" 정우가 히죽 웃으며 내 어깨를 쳤다. "야, 너 표정 봐라. 지금." "무슨 표정." "모르는 척하는 표정." "그런 표정 없거든." "있어. 딱 그거야. 뭔가 있는데 없는 척하는 표정." 나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방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정우는 문틈에 발을 끼워 넣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비밀로 해줄까?" 그 말에 나는 문을 열던 손을 멈췄다. "뭘 비밀로 해." "방금 그 표정, 그리고 서은채가 여기 드나드는 거." 정우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진지했다. "소문나면 골치 아파질 사람은 너잖아. 걔가 어떤 급인지 몰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이미 그럴 필요가 생겼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그리고 그 낯섦보다 더 이상한 건, 정우의 그 말에 순간적으로 안도했다는 사실이었다. 무엇으로부터의 안도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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