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우리는 늘 같은 오케스트라였다.
배정받은 반이 갈렸을 때도, 서지수와 나는 같은 현악부 명단에 이름이 나란히 붙어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연습실 냄새는 삼 년 내내 똑같았다. 니스와 로진 가루, 낡은 나무 바닥의 냄새.
그 냄새를 맡으면 이상하게 숨이 편해졌다.
서지수는 3년 내내 수석이었다.
나는 늘 그 옆자리, 부수석이었다.
오디션 결과가 붙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조금씩 기대했다.
혹시나, 이번엔.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서지수, 1st.
이도현, 2nd.
담당 선생님은 늘 웃으며 말했다.
"너희 둘은 세트냐. 만날 나란히 붙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세트라는 말.
그 애랑 한 세트로 묶인다는 것.
그 애의 옆자리는 좋았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활을 잡는 손목의 각도, 숨을 들이마시는 타이밍, 어려운 소절 앞에서 살짝 미간을 좁히는 버릇까지.
나는 그 모든 걸 외우고 있었다.
악보보다 그 애를 더 오래 봤다.
고1 겨울, 나는 처음으로 고백했다.
그날은 눈이 왔다.
연습이 끝난 뒤 다들 빠져나간 텅 빈 연습실에, 서지수와 나만 남아 있었다.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에 눈송이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나는 문을 잠깐 잠갔다.
손이 떨리는 걸 애써 참으며 말했다.
"나랑, 사귀어 볼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연습실 안이 순간 너무 조용해서, 내 심장 뛰는 소리가 그 애한테까지 들릴 것 같았다.
서지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악기 케이스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한 번 쳐다봤다.
그러다 활을 다시 들었다.
"미안. 지금은 연애할 마음이 없어."
그게 다였다.
미안하다는 말,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연습.
활이 현을 긋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 애의 연주를 들었다.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듣고 싶어졌다.
문을 다시 열고 나올 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화가 안 나지.
답은 쉽게 나왔다.
저 소리를 계속 들을 수만 있다면, 그거면 됐다고.
고2 봄, 나는 다시 고백했다.
벚꽃이 지는 등굣길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눈처럼 흩날렸고, 그중 몇 장이 서지수의 어깨에 앉았다가 다시 떨어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나 진심이야."
서지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꽃잎을 밟으며 계속 걸었다.
"알아. 근데 지금은 아니야."
그 말이 이상했다.
지금은 아니라는 말.
그럼 언제는 되는 걸까.
나는 그 애매한 여지에 매달렸다.
그 말 한마디를 몇 번이나 곱씹었는지 모른다.
학교 가는 길, 집에 오는 길, 자기 전까지.
지금은 아니라는 건, 나중은 될 수도 있다는 뜻 아닐까.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기다리면 되는 거니까.
그해 여름, 나는 서지수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작곡가의 CD를 몰래 사서 선물했다.
서지수는 고맙다고 했다.
그게 다였다.
더 묻지 않았다.
더 바라지 않으려고 했다.
고3 가을, 마지막으로 고백했다.
입시가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다들 실기 준비로 예민해져 있던 시기였고, 연습실 앞 복도에는 늘 대기하는 애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말을 꺼냈다.
"졸업하면, 그때는 어때?"
서지수는 나를 오래 쳐다봤다.
그 눈빛에 뭔가가 있었다.
슬픔 같기도 하고, 짜증 같기도 한 것.
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알 수 없었다.
"도현아."
그 애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성을 붙이지 않고, 그냥 이름만.
그게 오히려 더 아프게 들렸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심장이 내려앉았다.
발밑이 순간 꺼지는 느낌이었다.
"누구?"
"말 안 할 거야."
그 순간 뭔가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속에서 난 소리였는지, 실제 소리였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문을 닫는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내 안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로 기억한다.
"그럼 나는 뭐야."
내 목소리가 떨렸다.
스스로 듣기에도 한심할 정도로 떨렸다.
서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어려운 소절이었다.
활이 현을 긋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등지고 연습실을 나왔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고백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방식을 택했다.
곁에 있는 것.
그저 곁에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스스로를 세뇌했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등교하고, 같은 파트를 연습하고, 같은 자리에서 밥을 먹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견딜 수 있다고 믿었다.
***
대학 입시 결과가 나왔다.
서지수는 전국 콩쿠르 대상 출신으로 음대 수석 입학이 확정됐다.
나는 간신히 같은 학교 같은 과에 붙었다.
합격자 발표가 난 날, 부모님은 축하한다고 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같은 학교, 같은 과.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기뻤다.
입학식 날, 캠퍼스는 낯선 얼굴들로 가득했다.
새로 산 정장 재킷이 아직 몸에 익지 않아 어깨가 불편했다.
나는 서지수를 찾아 캠퍼스를 두리번거리다가, 우연히 그 애가 통화하는 걸 들었다.
캠퍼스 벤치 뒤편이었다.
벚꽃이 다 지고 초록 잎이 무성해진 나무 아래, 서지수가 휴대폰을 귀에 대고 서 있었다.
"…아니, 그냥 축하 전화 한 거예요."
서지수의 목소리가 낮고 조심스러웠다.
평소와는 다른 톤이었다.
삼 년을 옆에서 들어온 목소리인데, 그 순간의 톤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선배님 콩쿠르 소식 들었어요. 그랑프리 축하드려요."
나는 발을 멈췄다.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이상했다.
존경 이상의 것이었다.
말투 사이사이에 숨길 수 없는 떨림이 있었다.
"…네. 저도 열심히 할게요."
전화를 끊은 서지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휴대폰을 든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표정이 무너져 있었다.
웃고 있는데도 슬퍼 보였다.
그런 얼굴은 처음 봤다.
삼 년 내내 그 애의 옆자리에 있었는데도, 나는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누구지.
선배라니.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
설마, 그 사람이야?
삼 년 동안 나를 거절하게 만든 그 사람이?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뒤엉켰다.
언제부터였을까.
얼마나 오래 좋아한 걸까.
나는 그동안 대체 뭘 붙잡고 있었던 걸까.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자리를 떴다.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다리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천장을 보고 누워서, 서지수의 무너진 표정을 몇 번이고 떠올렸다.
다음날, 학과 게시판에 콩쿠르 결과가 붙어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그 앞에 몰려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게시물을 확인했다.
피아노 부문 그랑프리, 강현우.
음대 4학년.
그 이름이 이상하게 크게 눈에 박혔다.
게시판에 붙은 수많은 이름들 중에서, 오직 그 이름 세 글자만 도드라져 보였다.
나는 그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사람들이 다 흩어지고 나서도, 나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강현우.
서지수가 삼 년 내내 마음에 품고 있던 이름이,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