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늘부터 거절합니다

1화

아침 일곱 시 반. 교문 앞에서 벌써 세 개의 부탁을 받았다. 첫 번째는 시작부터 이랬다. "준호야, 이거 다혜한테 좀 전해줘." 반장 누나가 도시락 가방을 내밀었다. 가방 손잡이에 리본까지 묶여 있었다. 저 정성은 다혜한테 가는 거고, 나는 그냥 배달원이다. "어, 그래." 나는 손을 뻗었다.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게 문제였다. 머리가 판단하기 전에 손이 먼저 나간다. 열일곱 살 인생, 반사 신경만 놓고 보면 나는 거의 운동선수였다. 가방을 받아 든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하윤이었다. [오늘 점심시간에 잠깐 얘기 좀 해줄 수 있어? 남자애 문제로 고민이 있어서.] 나는 걸으면서 답장을 눌렀다. [어 그래 점심시간에 봐.] 손끝이 자판 위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상했다. 남자애 문제라니. 내가 그 방면으로 뭘 안다고. 연애 상담을 나한테 하는 애들은 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걸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나를 아무것도 아닌 걸로 본다는 것. 위험하지 않으니까, 부탁하기 편하니까. 교문을 지나자 이번엔 수아였다. "선배! 이거 무거운데 교무실까지만 들어주세요!" 수아가 종이 박스를 안고 헐떡이며 다가왔다. 숨소리가 좀 과장된 것 같았지만 굳이 짚지 않았다. 박스는 사실 별로 무거워 보이지 않았다. 겉면에 큼지막하게 인쇄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A4용지 500매. 안 무거울 리가 없나. 그래도 두 손으로 번쩍 드는 걸 보면 딱히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어, 그래." 나는 도시락 가방을 한쪽 팔에 걸고 박스를 받았다. 양팔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뒤에서 누군가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반 애들 몇 명이 이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준호 또 짐꾼 됐네." "저 자식 언제 저거 다 처리하냐." "야, 저러다 리어카 끌고 다니는 거 아니냐." 웃음소리가 등 뒤로 따라붙었다. 나는 그냥 웃었다. 웃는 게 제일 쉬웠다. 화를 낼 힘도 없었고, 화를 낼 이유를 대라고 하면 딱히 댈 말도 없었다. 다들 무거운 걸 들어달라고 했을 뿐, 나쁜 짓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교실로 가는 길에 다혜를 만났다. 다혜는 도시락 가방을 받자마자 별말 없이 열어봤다. "김밥이네. 됐어." 다혜가 짧게 말하고 돌아섰다. 고맙다는 말은 없었다. 원래 그랬다. 다혜한테 고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는 그래도 "고마워" 정도는 들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그 말이 생략됐는지 짚어보려다 그만뒀다. 어차피 답도 안 나오는 질문이었다. 교무실에 박스를 내려놓고 나니 벌써 1교시 시작종이 울렸다. 숨이 조금 찼다. 아침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팔에는 아직도 박스 모서리가 닿았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런 흔적까지 남기고 가다니, 그 A4용지 박스는 생각보다 무거웠던 게 맞나 보다. 그런데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왜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냥 그게 익숙했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느낌. 그게 부탁이라는 형태로만 온다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 2교시가 끝나고 도서실 앞을 지나갈 때였다. 창가 자리에 누가 앉아 있었다. 윤서연. 같은 반이지만 대화를 나눈 적은 거의 없는 애였다. 1년 내내 같은 교실에 있었는데도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조용한 애, 라는 인상 하나로 뭉뚱그려져 있었다. 책을 읽고 있었는데, 시선이 책이 아니라 창밖을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창밖, 그러니까 나를. 눈이 마주쳤다. 서연은 놀란 기색도 없이 그냥 다시 책으로 눈을 내렸다. 그 동작이 너무 태연해서, 오히려 내가 놀란 쪽이 됐다. 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오래 보고 있었다는 걸 처음 느낀 것 같았다. 다들 나를 보긴 봤다. 하지만 그건 부탁할 게 있을 때뿐이었다. 필요한 게 있어서 보는 눈, 뭔가를 얻어내려는 눈. 나는 그런 시선에는 익숙했다. 오히려 그게 편했다. 부탁이 뭔지 알면 뭘 해야 하는지도 바로 알 수 있으니까. 서연의 눈빛은 그런 게 아니었다. 뭘 원해서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냥, 보고 있었다. 목적 없이. 그게 낯설어서 걸음이 순간 삐끗했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꾸 뒤가 신경 쓰였다. 도서실 문 너머로, 창가 자리로. 목덜미가 조금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3교시 국어 시간에도 그 장면이 자꾸 떠올라서 선생님이 칠판에 쓴 문장을 두 번이나 놓쳤다. 그날 오후, 나는 다시 그 자리를 지나갔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정말로. 서연은 없었다. 대신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표지가 낡아 있었다. 몇 번을 읽었는지 짐작도 안 될 만큼. 귀퉁이가 다 닳아서 둥글둥글해진 모서리, 책등에는 손때가 반질반질하게 묻어 있었다. 누군가 이 책을 정말 오래, 정말 여러 번 펼쳤다는 걸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왜 그 책상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펼쳐진 페이지를 읽어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남의 책을 몰래 보는 것 같아서. 대신 그 자리에, 아무도 없는 창가에 남은 온기 같은 걸 괜히 느껴보려고 했다. 물론 의자는 이미 차가웠다. 종이 울리는 소리에 겨우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걸으면서도 자꾸 뒤통수가 그 창가 자리를 향해 당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날따라 부탁도, 웃음소리도 다 멀게 느껴졌다. 그 대신 낯선 감각 하나가, 아주 조용히, 내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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