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늘부터 거절합니다

2화

"준호야, 나 이거 좀." 점심시간, 급식실 앞에서 하윤이 나를 붙잡았다.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화면 밝기가 너무 세서 눈이 시렸다. "어제 그 남자애가 답장을 안 해. 이거 봐줘." 나는 하윤의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대화창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스크롤을 몇 번 내려도 끝이 안 보였다. 이걸 다 읽어야 하나. 읽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음, 이건... 그냥 답장이 늦은 거 같은데." "아니야, 분명 나한테 마음이 있는데 왜 이러는 거야." 하윤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근거는 없는데 확신만 있는 게 신기했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거봐! 그렇지!" 하윤이 활짝 웃으며 자리를 떴다. 나는 아무것도 해결한 게 없는데 뭔가 해결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착각이었다. 사실은 내가 한 말이라고 해봐야 그럴 수도 있지, 그게 전부였는데. 그런데도 하윤의 얼굴은 답장을 이미 받은 사람처럼 밝았다. 이게 맞나. 아니야, 이게 맞을 리가 없는데. 급식판을 들고 자리에 앉으니 반 애들이 또 몰려왔다. 줄줄이, 한 명씩. 꼭 순서를 정해놓은 것처럼. "준호야, 이번 주 청소 당번 좀 바꿔줄 수 있어?" "나 이번에 학원 상담 있어서." "어, 그래." 대답이 먼저 나가고 생각이 나중에 따라왔다. 청소 당번을 두 번 연속 바꿔주는 건 이상하다는 생각이, 이미 대답을 한 다음에 떠올랐다. 입이 뇌보다 빠른 것 같았다. 이게 습관인가. 습관이면 고쳐야 하는데 고칠 타이밍을 매번 놓쳤다. "진짜 이준호 착하다." 착하다는 말이 칭찬처럼 들렸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편리하다는 말과 똑같이 들렸다. 숟가락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밥알을 씹는데 맛이 잘 안 느껴졌다. 건너편에서 누군가 또 말을 걸었다. "준호야, 너 나중에 나랑 조 같이 하자." "어, 그래." 또 그 말이 나갔다. 생각보다 입이 먼저. *** 점심을 다 먹기도 전에 다혜가 급식실로 들어왔다. 문을 밀고 들어오는 기세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다혜는 내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크게 났다. "야, 오늘 아침 도시락 왜 김밥밖에 없었어." "어, 반장 누나가 그거만 준비했다고 해서." "그럼 딴 것도 좀 사 오라고 했어야지." 말이 안 되는 논리였다. 나는 그냥 도시락 가방을 전달하는 역할이었는데, 도시락 내용까지 내 책임이 됐다. 전달책인데 요리사 취급을 받는 기분이었다. "다음엔 신경 쓸게." 나는 또 그렇게 대답했다. 이 말도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가 없었다. 다혜는 그제야 만족한 듯 자리를 떴다. 가는 뒷모습마저 당당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나를 보며 웃었다. "준호야, 너 다혜한테 왜 그렇게까지 해줘?"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라서." "그래도 이건 좀..." 말이 끝나기 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듣고 나면 뭔가 인정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어릴 때부터. 그 말이 내 안에서 자꾸 울렸다. 편리한 방패처럼. 쓸 때마다 닳는 것도 모르고 계속 꺼내 쓰는 방패처럼. - "준호야, 넌 나 없으면 재미없어." 다혜가 초등학교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 말이 특별한 애정처럼 느껴졌다. 운동장 그늘에 앉아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혜가 그 말을 했을 때.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까지 났다.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냥 무게였다. 손끝으로 식판 가장자리를 꾹 눌렀다. 그러면 뭔가 눌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안 눌러지는데. *** 오후 자습 시간, 도서실에 들렀다. 서연이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제도 저 자리였는데. 자리가 정해진 것도 아닌데 늘 같은 자리라는 게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이번엔 나를 보지 않았다. 책에만 시선이 고정돼 있었다. 속눈썹이 아래로 접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얼른 눈을 돌렸다. 괜히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했다. 어제까지 몰랐던 애한테 서운함을 느낀다는 게. 이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되지. 근데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나는 조용히 책장 사이를 지나갔다. 책 제목들을 눈으로 훑었지만 하나도 안 읽혔다. 서연 근처 자리에 앉아 아무 책이나 펼쳤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같은 줄을 세 번쯤 읽고도 무슨 내용인지 몰랐다. 대신 옆자리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계속 신경 쓰였다. 넘어가는 페이지 수를 세고 있었다. 스무 장쯤 넘어갔을 때 그만뒀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딸깍. 서연이 샤프심을 눌러 넣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인데도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도서실 안이 조용해서 그런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책상 밑으로 손끝을 꾹 눌렀다. 손이 차가웠다. 에어컨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구분이 안 됐다.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서연이 그때 처음으로 고개를 살짝 들었다. 눈이 마주칠 뻔했다. 정확히는, 마주치기 직전에 서연이 다시 시선을 내렸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쿵, 뛰었다. 그 한 박자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 이유도 찾지 못한 채로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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