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기차가 멈췄다.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살짝 쏠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서서히 느려지다가 완전히 정지했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알았다. 청목역의 냄새였다. 젖은 흙과 오래된 나무 벤치, 그리고 어딘가에서 풍겨오는 옥수수 삶는 냄새. 그 냄새가 코끝에 닿는 순간, 몸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감각이 한꺼번에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6년 만이었다.
플랫폼에 발을 딛는 순간, 다리가 잠깐 후들거렸다. 여기가 맞나. 이렇게 작았나. 기억 속의 역사는 훨씬 크고 넓었는데, 지금 보니 그냥 낡은 시골 간이역이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기둥, 녹슨 표지판, 그 위에 앉아 있던 참새 몇 마리가 내가 다가가자 후드득 날아올랐다.
가방을 고쳐 메고 계단을 내려섰다.
발밑에서 나무 계단이 삐걱, 울었다. 그 소리마저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도 이 계단은 늘 이렇게 울었으니까.
그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도윤아."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렸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애가 서 있었다. 긴 머리가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고, 손에는 무언가를 꼭 쥐고 있었다. 나를 보는 눈이 젖어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원피스 자락이 살랑, 흔들렸다.
"...누구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여자애의 표정이 무너졌다. 마치 얼음이 갈라지듯, 순식간에.
"나 몰라? 은채야. 서은채."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기억이 확 몰려들었다. 울보였던 여자애. 무릎이 까지면 나한테 뛰어와서 엉엉 울던 애.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키도 자랐고, 얼굴선도 달랐고, 눈빛도 달랐다. 어릴 때의 둥글둥글한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은채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빠, 나는 기억 안 나겠지?"
키가 훌쩍 큰 여자애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시 잡지에서 본 모델 같은 비율이었다. 짧은 커트머리에 냉소적인 미소. 다리를 살짝 꼬고 선 자세마저 여유가 넘쳤다.
"...소라?"
한소라였다. 예전엔 남자애들보다 더 거칠게 뛰어다니던 말괄량이였는데, 지금은 그 흔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목소리만 겨우 그 시절의 잔재를 붙잡고 있었다.
"맞혔네. 근데 6년이나 걸렸어야 했나?"
소라의 목소리에는 웃음과 날카로움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그때,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목덜미가 서늘해질 정도로 강한 시선이었다.
돌아보니 한 여자애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표정이 없었다. 손에는 작은 수첩 같은 걸 들고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는데도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늘이?"
유하늘이었다. 예전에도 말이 없던 아이였는데 지금도 그대로였다. 다른 두 사람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오래전에 빌려준 물건을 회수하러 온 사람처럼.
세 사람이 나를 둘러쌌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오빠, 우리 기다렸어."
은채가 손을 뻗어 내 옷깃을 잡았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손톱 끝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안 기다렸어."
소라가 곧바로 받았다. 그런데 그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팔짱을 낀 손가락이 살짝, 옷을 움켜쥐었다.
하늘은 아무 말 없이 수첩을 펼쳤다. 뭔가를 확인하듯 페이지를 넘기더니, 다시 나를 보았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숨이 막혔다.
세 사람의 눈빛이 각기 다른 온도로 나를 짓눌렀다. 은채는 젖은 눈으로, 소라는 날카로운 눈으로, 하늘은 무언가를 재는 듯한 차가운 눈으로.
왜 이렇게 됐지.
분명 그냥 동네 오빠였는데.
그때 기억이 훅 밀려들었다. 마치 발밑이 꺼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
6년 전, 이 역에서 나는 세 아이 앞에 서 있었다.
작은 배낭을 메고, 곧 떠날 기차를 기다리며. 그날도 하늘은 흐렸고, 플랫폼엔 우리 넷뿐이었다.
은채가 내 다리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붙잡았는지, 바지가 다 늘어질 정도였다.
"오빠 가지 마."
목소리가 코맹맹이였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데, 그 얼굴이 너무 작고 여려서 마음이 아렸다.
"금방 올 거야. 방학마다 올게."
그때의 나는 그 말이 그냥 하는 위로인 줄도 몰랐다. 진심이었으니까. 정말 그럴 줄 알았으니까. 열세 살짜리의 다짐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그때는 몰랐다.
소라는 팔짱을 끼고 시선을 피했다. 발끝으로 자갈을 툭툭 걷어차면서.
"안 와도 돼. 상관없어."
그러면서도 눈은 붉어져 있었다.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 애가 나를 등지고 서 있던 이유를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울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늘은 아무 말도 없이 내 손을 붙잡았다. 작은 손이었다. 차갑고 마른, 그런데도 놓지 않던 손. 그 손안에 뭔가를 쥐여줬다. 조약돌이었다. 반질반질하게 닳은, 어디서 주웠는지 모를 평범한 돌.
"...이거 왜?"
하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 눈빛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잊히지 않았다.
기차가 서서히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철로가 웅웅, 울렸다.
나는 그때, 별 생각 없이 말했다.
"절대 너희 안 버려. 약속해."
세 사람의 표정이 순간 달라졌던 걸, 그때는 눈치채지 못했다. 은채는 울음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봤고, 소라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고, 하늘은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그 말이 이렇게 무거워질 줄은 몰랐다.
기차가 멈춰서고, 나는 손을 흔들며 올라탔다. 창문 너머로 세 아이가 점점 작아지는 걸 보면서도, 나는 그저 방학이 빨리 오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
눈을 떴다. 현재로 돌아왔다.
세 사람은 여전히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은채의 손은 아직 내 옷깃을 놓지 않았고, 소라는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하늘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수첩을 든 채였다.
플랫폼의 낡은 스피커에서 지지직, 잡음이 흘러나왔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오빠."
은채가 다시 불렀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 낮아져 있었다.
"이번엔 진짜 안 갈 거지?"
대답을 하려는데, 목이 잠겨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부딪혔다. 서로를 견제하듯, 그리고 다시 나를 향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이 얼마나 복잡한지 느낄 수 있었다. 은채는 불안하게, 소라는 경계하듯, 하늘은 여전히 무언가를 재듯이.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여름 날씨도 아닌데, 등줄기가 축축했다.
문득 조약돌이 떠올랐다. 6년 동안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잊고 지냈던 그 돌. 그게 지금 어디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 마을에, 내가 다시 발을 들인 게 맞는 걸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세 사람의 눈빛은 여전히 내게서 떠나지 않았고, 그 무게가 점점 더 무겁게 어깨를 눌러왔다. 마치 6년 전 그날의 약속이, 지금 이 순간 나를 심판하러 온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