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할머니가 남긴 말이 밤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오래된 나무 냄새, 그리고 그 밑에 깔린 옅은 곰팡이 냄새.
방은 6년 전 내가 쓰던 그 방이었다.
벽지도 그대로, 책상도 그대로.
창가에 걸린 커튼조차 그대로였다. 색이 조금 바랬을 뿐, 무늬도, 늘어진 모양도 기억 속 그대로였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시간이 멈춰 있었다.
이 방만큼은, 내가 떠났던 그 순간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은 것처럼.
다른 게 있다면, 책상 위에 무언가 낯선 물건들이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노트 한 권.
작은 수첩 한 권.
그리고 편지 봉투 몇 개.
정갈하게, 나란히.
누군가 일부러 그렇게 배열해둔 것 같았다.
숨이 저절로 멈췄다.
나는 천천히 책상으로 다가갔다. 발걸음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마치 그 물건들이 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다가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같기도 했다.
노트를 먼저 집어 들었다.
표지에 '오빠 생각 노트'라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은채의 글씨였다.
어릴 때부터 늘 서두르듯 써 내려가던 그 특유의 필체. 자음이 항상 살짝 기울어져 있는.
손끝이 표지를 쓸어내렸다. 종이가 낡아 있었다. 몇 번이나 펼쳐 봤는지,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 있었다.
첫 페이지를 넘겼다.
1회. 오빠가 나 계란찜 먹여줌.
2회. 오빠가 나 업어줌.
3회. 오빠가 내 머리 쓰다듬어줌.
손이 떨렸다.
기억나지 않는 순간들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기억은 나지만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갔던 하루의 조각들이었다. 그런데 그 조각들이 여기, 이렇게 숫자를 달고 정리되어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숫자가 커졌다.
10회. 오빠가 나 대신 숙제해줌.
23회. 오빠가 나 놀리는 애들 혼내줌.
37회. 오빠가 나 자전거 뒤에 태워줌.
각 줄마다 짧은 설명이 덧붙여 있었다. 날짜까지 적혀 있는 것도 있었다. 은채는 그날의 날씨나, 내가 입었던 옷의 색깔까지 기록해두었다.
이렇게까지, 일일이.
50회. 오빠가 나 손잡고 학교까지 데려다줌.
100회. 오빠가 나한테 예쁘다고 함.
100번째 옆에는 작은 별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색색깔 펜으로 몇 번이나 덧그린 듯 진하게.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을 때, 숫자가 눈에 박혔다.
142회. 오빠가 나한테 절대 안 버린다고 함.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기억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당에서, 저녁 어스름 속에서 은채가 울먹이며 나한테 안 가면 안 되냐고 물었던 날.
나는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어른들이 하는 말처럼 던졌던 말이었다.
절대 안 버려.
그 말이 은채에게는 142번째로 새겨진 순간이었다.
그 아래, 은채가 직접 쓴 글이 있었다.
"이 142번째 순간을, 나는 6년 동안 하루도 잊지 않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냥 다정하게 대했던 순간들이었다.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갔던 일상들. 그런데 은채에게는 그 하나하나가 숫자로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동안 무슨 표정으로 살았을까. 은채는 그 노트를 쓰면서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그 상상만으로도 명치 어딘가가 뻐근하게 조여왔다.
노트를 내려놓았다. 심장이 이상하게 무겁게 뛰었다.
책상 위, 노트가 놓였던 자리에 희미한 먼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는 뜻이었다.
이번엔 수첩을 집었다.
하늘의 것이었다.
겉표지에 이름은 없었지만 필체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딱딱하고 각진, 마치 도장을 찍은 듯한 글씨체.
펼치자, 날짜별로 정리된 짧은 기록들이 있었다.
○월 ○일. 도윤 오빠 방 창문 잠김 확인. 이상 없음.
○월 ○일. 도윤 오빠 방 불 꺼짐. 밤 11시 32분.
○월 ○일. 도윤 오빠 방 창문 열려 있음. 환기 중으로 판단.
처음엔 그저 단순한 메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기록의 빈도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매일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 방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창틀에 물기가 스몄는지 확인했다는 문장이 있었고, 겨울에는 보일러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체크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누구도 쓰지 않는 방인데도, 하늘은 마치 사람이 살고 있는 것처럼 그 방을 관리하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소름이 돋았다.
6년 내내, 내가 없는 이 방을 하늘이 확인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한 장, 두 장, 세 장. 넘길수록 손끝이 저려왔다. 이건 그냥 습관이 아니었다. 이건 무언가를 붙잡고 있으려는 몸짓이었다.
마지막 장에는 짧은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오빠가 없어도, 오빠의 방은 지킨다."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나는 수첩을 손에 쥔 채로 잠시 눈을 감았다. 하늘의 무뚝뚝한 얼굴이 떠올랐다. 낮에 만났을 때도 별다른 감정 표현 없이 그저 짧게 인사만 건네던 그 얼굴.
그 얼굴 뒤에, 이런 게 숨어 있었다니.
편지 봉투를 열었다. 소라의 것이었다.
짧은 메모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런 거 쓰는 거 진짜 별로인데, 그냥 버리려다가 뒀어. 신경 쓰지 마."
전형적인 소라의 말투였다. 시큰둥하고, 무심한 척. 예전부터 그랬다. 진심을 드러내는 걸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
말투는 시큰둥했지만, 그 메모지 뒷면에는 뭔가 지웠다 다시 쓴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종이를 창문 쪽으로 가져가 빛에 비춰보았다. 지워진 흔적이 그림자처럼 드러났다.
자세히 보니 지워진 글자 사이로 이런 문장이 언뜻 보였다.
"매년 여름, 역에 나가 있었어."
지워진 글자였는데도, 그게 이상하게 크게 눈에 들어왔다.
글자를 지운 흔적 위에 다시 글자를 눌러쓴 듯, 종이가 살짝 우글쭈글해져 있었다. 얼마나 여러 번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는지, 그 부분만 종이 결이 달라져 있었다.
소라가 매년 역에 나갔다고?
그런데 낮에 소라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안 기다렸어."
그 말을 할 때 소라의 표정이 떠올랐다. 팔짱을 끼고,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한 채, 무심하게 던졌던 그 한마디.
그 말과 이 메모가 충돌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었다.
소라는 왜 안 기다렸다고 말했을까. 매년 여름마다 역에 나갔으면서, 왜 그 사실을 굳이 지우고, 그리고도 나에게는 반대로 말했을까.
혹시 이 메모를 나한테 보여줄 생각이 아니었던 걸까. 실수로 흘러들어간 걸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노트를 다시 덮었다. 손이 여전히 떨렸다.
이 마을에서 내가 떠나 있던 6년 동안,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기다렸다.
은채는 숫자로, 하늘은 기록으로, 소라는 지워진 문장으로.
그 방식은 모두 달랐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의 무게는 다르지 않았다.
그 기다림의 무게가, 지금 내 손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나는 잠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가 창문을 두드렸다.
탁, 탁.
그 소리에 나는 노트를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수첩도, 편지 봉투도 그 위에 겹쳐 넣었다. 서랍을 닫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랍이 닫히는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탁.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 정적이 오히려 나를 짓눌렀다.
내일, 이걸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아직 답이 없었다.
세 사람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은채의 웃는 얼굴, 하늘의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소라의 시선을 피하던 얼굴.
그중 누구에게도, 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방에서, 나는 여전히 6년 전의 그 순간에 멈춰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세 사람은, 그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나만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창밖의 바람 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는 불을 끄지 못한 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