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방 안의 조명이 지나치게 인공적이라는 것이었다. 형광등도 아니고 백열등도 아닌, 은은한 금빛이 천장 전체에서 스며 나오는 조명이었는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 골머리를 앓다가 이내 깨달았다. 이거, 그 게임 오프닝 배경이잖아. '성공 용자의 학원 하렘 무쌍', 어제 새벽까지 콜라 세 캔을 비워가며 클리어했던 그 망작 에로게. 스팀 창에 '플레이 시간 47시간'이라는 숫자가 떠 있던 걸 마지막으로 본 게 분명 몇 시간 전인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천장 무늬는 그 로딩 화면에서 본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천장 모서리에 새겨진 넝쿨 문양까지도, 어쩐지 픽셀 하나하나가 눈에 그려질 정도로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던 그 이미지 그대로였다.
나는 손끝을 움직여보다가, 손등에 돋아난 금빛 잔털과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를 발견하고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자각했다. '이거 내 손이 아닌데.'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몸은 알아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는데, 마치 오래 입은 옷을 다시 걸치듯 몸이 익숙하게 반응하는 것이 더 소름 돋았다. 관절 하나하나의 각도, 이불을 걷어내는 손목의 방향,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순간의 무게중심까지, 이 몸은 나보다 이 몸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마치 몸에 별개의 운전자가 타고 있었고, 나는 그저 뒷좌석에서 창밖을 구경하는 승객처럼 얹혀 있는 기분이었다.
창밖으로는 첨탑이 늘어선 백색 건물들이 보였고, 대리석 바닥에 아침 햇살이 부서지듯 반사되는 광경이 낯설도록 선명했다. 아, 여기가 단천 왕립 용사학원인가. 게임 배경 원화 그대로였다. 다만 원화는 정적인 이미지였고, 지금은 콧속으로 젖은 잔디 냄새와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까지 파고들었다는 게 차이였는데, 그 생생함이 오히려 더 낯설게 다가왔다. 심지어 창틀에 앉은 새 한 마리가 부리를 다듬는 소리, 저 멀리 훈련장 쪽에서 들려오는 목검 부딪는 소리까지 귀에 걸려들었다. 게임에는 이런 배경음 하나 없었는데. 대체 어떤 개발사가 여기까지 만들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이건 개발사의 문제가 아니라 내 상식의 문제겠지.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금발에 녹안, 어딘가 나이보다 조숙해 보이는 이목구비까지, 이건 완벽하게 게임 주인공 이도현의 얼굴이었다. '와, 진짜로 하렘 게임 주인공한테 빙의라니.' 나는 손으로 뺨을 꾹 눌러보았는데, 통증이 확실히 느껴진다는 사실에 다시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거울 속 얼굴은 내가 밤새 스킵 버튼을 눌러가며 지겹도록 봤던 그 얼굴이었고, 심지어 왼쪽 눈썹 위 옅은 흉터 하나까지도 원작 설정 그대로 박혀 있었다. 이게 꿈이라면 지나치게 정교한 꿈이었고, 현실이라면 지나치게 어처구니없는 현실이었다. 나는 거울을 향해 손가락을 튕겨보고, 눈을 크게 떴다가 감아보고, 심지어 혀를 내밀어보기까지 했다. 거울 속의 나도 정확히 같은 타이밍에 혀를 내밀었다. 뭐, 당연한 거긴 한데, 이렇게 직접 확인해보니 실감이 배로 몰려왔다.
잠시 그렇게 굳어 있던 나는,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낮고 경쾌한 발걸음,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 "이도현, 아직 안 일어났어? 첫 수업 시작하는데." 문틈으로 은발이 살짝 비쳤다가 사라졌는데, 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감각이 몸을 관통했다. 저 목소리, 저 은발. 게임 속 메인 히로인 한서윤이었다. 청안 백작가의 영애이자 성녀로 불리는 그 캐릭터가, 지금 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목소리의 톤 하나, 어절 끝을 살짝 올리는 말버릇까지도 성우가 녹음한 대사 파일과 완벽히 겹쳤다. 나는 잠깐 숨을 멈추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게임 캐릭터가 실존한다는 것과, 그 캐릭터가 나를 향해 걸어온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층위의 충격이었다.
나는 서둘러 옷을 걸치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옷장을 열자 학원 제복이 걸려 있었는데, 옷깃에 새겨진 문양마저 게임 UI에서 본 그 배지와 똑같았다. 게임 스토리대로라면 지금은 학원 입학 초기, 그리고 나는—아니, 이도현은—평민 출신 검사로 라이벌 강태석에게 매번 처절하게 밟히는 역할이었다. 그 뒤로 이어질 전개를 떠올리자 위장 저 아래에서부터 뭔가 뒤틀리는 듯한 불쾌감이 올라왔다. 이 게임, 후반부에 가면 진짜 개막장이었지. 히로인이 라이벌에게 능욕당하는 장면이 스토리의 절반을 차지하는 그 미친 구성. 심지어 갈래 루트마다 결말이 갈라지긴 했지만, 이도현이 끝까지 살아남는 루트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대부분은 배경 취급으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설마 그걸 내가 직접 겪게 되는 건 아니겠지.' 애써 부정하면서도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떨림을 억누르려 손을 꽉 쥐었다가 펴며,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건 게임이야. 게임은 게임일 뿐이지.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문을 열었다.
문밖에 선 한서윤은 은발을 어깨 뒤로 넘기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동자가 게임 일러스트보다 훨씬 깊고 생생해서 순간 말을 잃었다. 하얀 피부, 옅은 하늘색이 도는 눈동자,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은발까지, 정지 화면으로만 보던 것과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뭐 하는 거야, 표정이 왜 그래?"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묻자, 나는 속으로 '이 목소리, 성우 캐스팅 진짜 잘했었네'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아니, 좀 이상한 꿈을 꿔서 그래." 그녀는 픽 웃으며 앞장서 걸었고, 나는 그 뒷모습을 따라가면서 이 세계의 규칙이 대체 뭔지,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왜 여기 처박혔는지에 대한 답을 전혀 찾지 못한 채로 복도를 걸었다.
복도는 백색 대리석으로 뒤덮여 있었고, 벽면 곳곳에 걸린 태피스트리에는 이 학원의 역사를 상징하는 듯한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발밑에서 울리는 구두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는데, 그 소리마저 게임 배경음 효과와 겹쳐 들려서 나는 걸음을 옮기는 내내 기묘한 이중 감각에 시달려야 했다. 한서윤은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나를 흘긋 살폈는데, 그 시선이 닿을 때마다 나는 태연한 척 시선을 피했다. 이 여자, 원작에서 성녀라는 설정 때문에 눈치가 이상하게 빠른 캐릭터였는데, 지금 저 표정을 보니 벌써부터 뭔가 이상한 걸 감지한 게 아닌가 싶어 등에 식은땀이 배었다.
복도 끝, 창문 너머로 보이는 훈련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흑발 소년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 햇살을 받아 검신이 번쩍이는 순간마다, 소년의 동작에는 낭비 없는 절도가 배어 있어서, 그저 실루엣만 보고도 이 학원에서 첫째가는 재능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소름의 정체를 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강태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