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의식이 가라앉는 감각은 마치 깊은 물속으로 천천히 끌려 들어가는 느낌과 비슷했다. 사방이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는데, 그 백색은 벽도 바닥도 없이 그저 무한히 뻗어 있는 듯했고, 나는 그 안에 홀로 부유하듯 떠 있었다. 발밑을 내려다봐도 딱히 발이라는 게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이거 죽은 건가.' 담담하게 자문하면서도 이상하게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넓고 조용한 공간이라면 낮잠 한숨 자기엔 딱 좋겠다는, 지금 상황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가한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 대신 눈앞에 붉은 문구 하나가 떠올랐다.
[경고: 정신 내상 감지. 자아 붕괴 위험도 상승 중.]
그 시스템 창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 게임, 진짜 이런 것까지 구현해놨었나. 개발자 정성이 참 그지같이 삐뚤어진 방향으로 발현됐군.' 냉소적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문구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깜빡이는 걸 보며 서서히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게임을 오백 시간쯤 넘게 돌렸어도 이런 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버그인가, 아니면 숨겨진 페널티 시스템인가. 어느 쪽이든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문구 아래로 작은 숫자 게이지가 붙어 있었는데, 그것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백 분율로 표시된 그 게이지가 백에 다다르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건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새하얀 공간 한복판에서, 마치 영사기처럼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결투장에서 짓밟히던 자신의 모습,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관중석에서 쏟아지던 조소, 누군가 던진 야유와 발밑에 굴러다니던 부서진 목검의 파편까지도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흐릿하게 지나가는 강태석의 시종들과 한서윤이 붙잡혀 끌려가는 잔상. 그녀의 은색 머리카락이 거칠게 잡아채이며 흩날리는 장면, 발버둥 치던 다리가 시종의 팔에 붙들려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장면까지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 잔상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손끝은 그저 허공을 스칠 뿐이었다. 마치 만질 수 없는 홀로그램을 붙잡으려는 꼴이었다. '이거 예지몽 같은 건가, 아니면 그냥 무의식이 만들어낸 최악의 시나리오인가.' 판단이 서지 않는 채로, 그 장면 속에서 강태석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평민 놈이 감히 성녀를 넘봐? 그 대가를 네 눈앞에서 똑똑히 보여주겠다."
그 말이 귓속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되며, 가슴 한복판에서 뭔가 뒤틀리는 듯한 불쾌한 감각이 치솟아 올랐다. 마치 위장 안에 뜨겁게 달군 돌덩이를 삼킨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불쾌함이었다. 목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같은 대사가 재생되고, 재생되고, 또 재생되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이 한 문장만을 반복 재생시켜 뇌리에 박아 넣으려는 것처럼.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불쾌한 감각이 순수한 공포나 분노로만 남지 않고, 그 밑바닥에서 낯설고 뒤틀린 감정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뭘 느끼는 거지.' 나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그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썼지만, 그것은 마치 검은 잉크가 물속에 퍼지듯 형체 없이 마음 전체를 물들이기만 했다. 분명 두려워야 했고, 분노해야 했다. 그런데 그 밑에서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저 장면을 더 보고 싶다는—아니, 봐야만 한다는 강박적인 충동이 함께 일어나고 있었다. 시야가 저절로 그 잔상 쪽으로 끌려가는 느낌, 마치 목덜미를 뒤에서 잡아채여 억지로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듯한 억지스러운 감각이었다. '이거 설마, 게임 시스템이 강제로 심어놓은 서사적 장치인가.' 나는 그렇게 합리화하려 애썼지만, 그 시도 자체가 이미 뭔가 잘못되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경고: 감정 재구성 프로토콜 가동 중. 대상: 이도현. 유형: 굴욕/상실 기반 애착 강화.]
새로운 문구가 시야를 가로지르며 떠오르자, 나는 그 문구를 마주한 채 굳어버렸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문구의 의미는 변하지 않았다. '굴욕과 상실을 기반으로 애착을 강화한다'라니, 이건 무슨 삼류 연애 시뮬레이션에서나 볼 법한 심리 조작 로직이 아닌가. '이 게임, 진짜 히로인이 능욕당하는 장면을 주인공한테 억지로 이입시켜서 뭔가 이상한 감정을 만들어내려는 거였구나.'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소름을 느꼈다. 예전에 공략 위키를 뒤적일 때, 유저들 사이에서 '이 게임 서브 히로인 취급이 좀 이상하다'는 후기를 본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밸런스 불만 정도로 넘겼는데, 지금 이 순간 그 후기의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 이건 단순한 스토리 진행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가—혹은 이 게임의 시스템이—의도적으로 나를, 아니 이도현을 뒤틀린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빌어먹을. 캐릭터 애착도를 올리는 방식이 굴욕과 상실이라니, 이건 히로인을 향한 감정이 아니라 트라우마를 이용한 세뇌 아닌가. 나는 그 자각과 동시에 이를 악물었다. '절대 이대로 순응하지 않을 거야.' 시스템이 뭘 심으려 하든, 나는 이도현이면서도 이도현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 머릿속에서 굴러가는 사고방식만큼은, 이 세계의 논리에 통째로 잡아먹히진 않겠다는 오기가 치솟았다.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시야 전체가 붉게 물들며 격렬한 두통이 뇌를 관통했다. 마치 누군가 관자놀이 양쪽을 동시에 못으로 박아 넣는 듯한 통증이었다. 나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그 새하얀 공간 속에서 무릎을 꿇었다. 백색이 붉게 번지고, 그 붉음 속에서 게이지가 순식간에 치솟아 오르는 것이 보였다. 칠십, 팔십, 구십. 저게 백에 닿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질문에 답을 얻기도 전에, 시야가 완전히 암전됐다.
의식이 다시 떠오르려는 그 찰나, 마지막으로 들려온 것은 낮고 냉정한 목소리였다.
"깨어나셨습니까."
익숙하지 않은, 사무적이고 건조한 어조였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는데,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낯선 방의 천장이었다. 새하얀 석고로 마감된 천장에는 금박으로 그려진 넝쿨무늬가 촘촘히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로 은은한 등불이 매달려 흔들리며 방 전체에 옅은 주황빛을 뿌리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다리가 마치 남의 것인 양 무겁게 늘어져 말을 듣지 않았다. 관절 하나하나가 삐걱거리는 느낌, 결투장에서 두들겨 맞은 몸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 옆에 서 있는 흑색 제복을 입은 시종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각진 턱과 무표정한 눈매, 허리를 곧게 세운 자세까지, 딱 봐도 감정 표현을 훈련받은 적이 없는 인간처럼 보였다. 그 시종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몸 상태는 어떠십니까."
"글쎄, 방금 전까지 뇌가 못질당하는 꿈을 꿔서 그런지 딱히 좋진 않은데." 나는 목이 잠긴 소리로 대꾸하며 상반신을 억지로 일으켰다. 어지러움이 확 몰려왔지만, 이 상황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손해라는 계산이 먼저 섰다. "여긴 어딘가?"
"강태석 공자님의 별채입니다." 시종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결투 이후 의식을 잃으신 상태로 이곳으로 옮겨지셨습니다."
"참 배려심 넘치는 분이시군. 얻어맞은 사람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재워주기까지 하고." 나는 냉소를 감추지 않고 중얼거렸다. 물론 그게 순수한 호의일 리 없다는 건 나도, 시종도 알고 있었다. 시종은 그 말에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강태석 공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한서윤 영애님도 함께 계십니다."
그 순간 나는 등줄기 전체를 관통하는 소름과 함께, 저 새하얀 공간에서 보았던 그 뒤틀린 장면이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빛의 각도로 보아 시간이 꽤 흘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고,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이미 그 백색 공간이 미리 보여준 것 같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시종에게 물었다.
"한서윤 영애가, 왜 거기 있는 건가."
시종은 그 질문에 아주 짧게, 그러나 서늘하게 대답했다.
"직접 확인하시는 것이 빠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