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결투 당일 아침, 학원 본관 앞은 이미 인산인해였다. 계단식으로 늘어선 관람석에는 귀족 학생들이 화려한 예복을 입고 앉아 있었는데, 자수가 놓인 옷깃마다 가문의 문장이 박혀 있어서 멀리서 봐도 누가 어느 집안 자제인지 대충 짐작이 갈 정도였다. 평민 학생들은 그 뒤편, 그늘도 제대로 지지 않는 구석에 서서 조용히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배치 자체가 이미 이 학원이라는 곳의 계급 구조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결투 하나 보러 오는 데도 좌석 등급이 나뉘는 건가.' 나는 속으로 실소하며 회랑을 걸었다. 전생에 콘서트 암표 구하느라 밤새 새로고침하던 시절이 떠올랐는데, 그때는 최소한 돈만 있으면 자리를 살 수 있었지, 여기서는 혈통이 곧 좌석 등급이니 오히려 그쪽이 더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랑을 걷던 중, 갑자기 발밑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것은 진짜 땅의 흔들림이 아니라 내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었다. 무릎 관절이 자기 마음대로 삐걱거리는 느낌이랄까, 마치 오래된 나무문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다리 전체가 미세하게 떨렸다. '와, 이거 진짜 무대공포증까지 이입되는 건가.' 자조하듯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애써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나는 게 느껴졌지만, 여기서 멈춰 서면 그 자체로 이미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 될 것 같아서 억지로 한 발씩 내디뎠다.
옆에서 나를 배웅하던 한서윤이 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그 손끝이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웠는데, 그 온기가 손끝을 타고 전해지면서 조금은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신기한 일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다리가 물에 젖은 종이처럼 후들거렸는데, 그녀의 손 하나로 뼈대가 다시 세워지는 기분이었으니까. "긴장하지 마. 넌 이미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그녀의 위로가 진심으로 느껴져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웃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 안에는 나를 믿는다는 확신 같은 것도 섞여 있어서, 나는 그 눈빛 하나로 아까의 자조가 무색해질 만큼 잠깐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러나 회랑 중간즈음에서 갑작스레 그림자 하나가 뛰어들었다. 흑발이 시야를 가리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강렬한 충격이 옆구리를 강타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뒤로 튕겨 나갔는데, 등이 회랑 벽에 부딪히는 통증이 뒤늦게 뇌를 관통했다. 통증이라는 게 이렇게 시차를 두고 오는 거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음엔 그냥 멍했고, 그다음에야 옆구리부터 등까지 불이 붙는 듯한 감각이 번져왔다. "뭐, 뭐야!" 나는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는데,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강태석이었다. 그는 검집도 열지 않은 채 팔꿈치와 발끝만으로 이 모든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 손짓 하나가 너무 태연해서, 마치 산책 나온 사람이 발에 걸린 돌멩이를 툭 차낸 것 같은 여유가 느껴졌다.
"공식 결투 전에 조금 인사나 나누고 싶어서." 그가 태연하게 웃으며 말하자, 나는 이가 갈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에 절망했다. 벽에 등을 대고 겨우 몸을 지탱하며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는 아까의 떨림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이번엔 순전히 충격 때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인사냐, 강도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그 투덜거림조차 목구멍 밖으로 나올 여력이 없었다.
"뭐 하는 짓이야!" 한서윤이 다급히 소리치며 나를 감싸려 했지만, 강태석의 시종 두 명이 순식간에 그녀를 붙잡아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녀의 옷자락이 시종의 손에 붙들려 구겨지는 모습을 보는데, 나는 그 장면 하나로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이건 정식 결투가 아니라 그냥 사전 인사입니다, 영애님." 시종 하나가 무표정하게 말하며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 말투가 어찌나 사무적인지, 마치 미리 대본을 외워둔 것처럼 감정 한 톨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다.
"놔!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놓으라고!" 한서윤이 다시 소리쳤지만, 시종들은 미리 훈련받은 듯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녀를 붙든 손을 풀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는 시도조차 강태석의 발끝에 밀려 다시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 자식, 진짜 미친놈이잖아.' 속으로 욕설을 삼키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절망스럽게 다가왔다. 전생이었다면 최소한 소리라도 지르며 저항했을 텐데, 이 몸뚱이는 통증에 못 이겨 반응 속도부터 늦어지는 게 느껴졌다.
"평민이 감히 성녀님의 손을 잡다니." 강태석이 낮게 중얼거리며 검집으로 내 어깨를 짓눌렀는데, 그 압박감이 뼈까지 파고드는 통증으로 이어졌다. 어깨뼈가 그대로 짓눌리는 느낌에 숨이 턱 막혔고, 나는 이를 악물고 그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완전히 힘의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그것은 그저 무의미한 발버둥에 불과했다. 검집 끝이 살을 파고드는 감각이 어깨부터 팔뚝까지 저릿하게 퍼졌다.
"공식 결투는 형식일 뿐이야. 진짜 승부는 이미 정해져 있거든." 그가 귓가에 낮게 속삭이듯 말하자,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는데, 그것이 오만에서 나온 확신인지, 아니면 정말로 뭔가를 준비해둔 확신인지 구별할 여력조차 없었다. 그 순간 결투장에서 종소리가 울렸고, 관람석에서는 결투 시작을 알리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함성이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음처럼 흐릿하게 귀에 닿았다.
강태석은 유유히 몸을 일으키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자, 이제 공식적으로 시작해볼까." 그 말투는 여전히 여유로웠고, 표정에는 승리를 이미 확신한 자만이 지을 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결투장 안으로 끌려 들어간 나는 제대로 서지도 못한 상태였지만, 관중들의 시선 앞에서 억지로 검을 들어야 했다. 백색 대리석으로 다져진 결투장 바닥은 아침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반사되었고, 그 위에 그려진 붉은 경계선이 마치 이 안에서 벌어질 일을 미리 경고하는 표식처럼 보였다. 관람석을 가득 채운 시선들이 일제히 나를 향했는데, 그 시선의 대부분은 동정보다는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보는 눈빛에 가까웠다.
강태석은 검을 뽑아 든 순간부터 여유롭게 웃고 있었는데, 그 미소가 마치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는 확신처럼 보였다. 검날이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이는 모습조차 나에게는 위협보다 조롱처럼 느껴졌다. 첫 합이 부딪히는 순간, 나는 손목이 통째로 꺾이는 듯한 충격에 검을 놓치고 말았고, 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대리석 위로 날카로운 금속음을 울렸다. 두 번째 합에서는 복부에 정확한 발차기를 맞아 숨이 턱 막혔고, 위장 속 내용물이 그대로 역류할 것 같은 통증이 명치를 강타했다.
관중석에서 야유와 조소가 뒤섞여 쏟아지는 가운데, 나는 무릎을 꿇은 채 피를 토해내며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입안에 번지는 쇠맛이 이 상황이 결코 연습 대결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실감시켜주었다. 관람석 어디선가 누군가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마저 점점 멀어지며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왜곡되어 갔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관람석 한쪽에서 창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한서윤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무언가 외치듯 벌어져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내 귀에 닿기도 전에 흐트러져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로 다가서는 낯선 남자들의 그림자. 검은 옷자락을 두른 그들의 형체는 관람석의 소란 속에서도 이상하게 정적인 움직임으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나는 그 정체를 확인할 새도 없이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