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이서준은 평소보다 삼십 분 일찍 눈을 떴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이었다.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이유는 스스로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냥 일찍 일어난 거야. 그냥.'
그러면서도 손은 벌써 셔츠를 고르고 있었다.
세수를 하는 내내 어제 옥상에서 봤던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달빛 아래서 표정을 감추던 그 얼굴.
그리고 오늘 아침, 교실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할 얼굴이 어떨지가 자꾸 신경 쓰였다.
'별 걱정을 다 하네. 내가 왜.'
교문을 들어서는 발걸음이 스스로도 이상할 만큼 빨랐다.
교실 문을 열자 윤하늬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친구들과 웃으며 떠드는 얼굴에는 어제의 그늘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손짓 하나, 웃음소리 하나까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마치 어제 옥상에서 마주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이었던 것처럼.
'저게 진짜 얼굴인가, 어제가 진짜 얼굴인가.'
이서준은 자리에 앉으면서도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미끄러졌다.
윤하늬가 친구의 어깨를 툭 치며 크게 웃는 순간, 이서준은 괜히 딴청을 피우듯 창밖을 봤다.
'왜 자꾸 신경이 쓰이지.'
수업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칠판을 보다가도 시선이 저절로 그녀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윤하늬의 뒷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필기를 하다 멈추고 옆자리 친구에게 뭔가 속삭일 때마다, 이서준은 펜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억지로 시선을 거뒀다.
'수업이나 들어.'
그러나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시선은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갔다.
같은 반 누군가가 이서준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야, 뭘 그렇게 봐."
"아무것도 안 봐."
"눈이 계속 저쪽으로 가는데?"
"착각이야."
이서준은 딱딱하게 대답하고는 칠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또 같은 자리를 보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하교 시간이 되자, 이서준은 가방을 챙기며 곁눈질로 윤하늬를 살폈다.
그녀가 교실을 나서는 순간, 이서준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 가?"
같은 반 친구가 물었지만 대답할 겨를도 없이 복도로 튀어나갔다.
무작정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미행이라기엔 어설펐고 우연이라기엔 티가 났다.
일정 거리를 두고 걷다가, 윤하늬가 뒤를 돌아볼 것 같으면 재빨리 전봇대 뒤로 몸을 숨기거나 휴대폰을 보는 척했다.
한 번은 그녀가 신발 끈을 고쳐 매려고 멈춰 서는 바람에, 이서준도 급하게 걸음을 멈추고 편의점 유리창에 얼굴을 박듯 시선을 돌렸다.
'들켰나.'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행히 윤하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윤하늬는 학교 앞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골목 안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이서준은 걸음을 멈췄다.
'버스를 안 타네?'
의아함과 동시에 발이 저절로 편의점 쪽으로 움직였다.
유리문 너머로 그녀가 앞치마를 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익숙한 손짓으로 매듭을 짓고, 머리를 대충 묶어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계산대 뒤에 서서 손님을 맞는 손짓이 능숙했다.
바코드를 찍는 속도도, 봉투에 물건을 담는 손놀림도 전부 자연스러웠다.
이서준은 편의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알바를 하는구나.'
교실 안에서 밝게 웃던 얼굴과, 지금 계산대 앞에서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는 얼굴이 겹쳐 보였다.
또 그 위로 어제 옥상에서 마주했던 얼굴이 겹쳐졌다.
세 개의 얼굴이 하나로 합쳐지지 않고 계속 따로 떠올랐다.
'대체 어떤 게 진짜야.'
그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여기 계셨습니까."
검은 세단에서 내린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집안 기사, 박 기사였다.
이서준은 반사적으로 그의 앞을 가로막듯 몸을 틀었다.
등 뒤로 편의점 유리창을 가리듯 섰다.
"쉿, 조용히."
"예?"
박 기사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냥 조 실장님이라고 불러요."
"예?"
"조 실장님. 다시."
박 기사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오랜 세월 이 집안에서 일한 사람답게 순응이 빨랐다.
"조 실장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뻣뻣한 대사였지만 다행히 편의점 안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별일 아니야. 그냥 지나가다가."
"지나가다가 왜 편의점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계셨습니까?"
"그냥, 뭐 살 게 있어서."
"그럼 들어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곧 들어갈 거야. 근데 여긴 왜 왔어."
박 기사가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회장님께서 오늘 저녁 식사에 참석하시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알았으니까 얼른 가."
"직접 전화로 말씀드려도 되는데, 회장님께서 굳이 사람을 보내라고 하셔서……"
"알았다고. 얼른 가."
이서준은 박 기사를 억지로 차에 태워 보냈다.
박 기사가 문을 닫기 전, 편의점 안쪽을 슬쩍 보려 하자 이서준이 몸으로 시야를 가리며 문을 쾅 닫아버렸다.
검은 세단이 골목을 빠져나가는 걸 확인한 뒤에야 숨을 내쉬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하늬가 봤으면 어쩌려고.'
다행히 그녀는 계산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새 손님이 들어와 담배를 찾는 통에, 진열대 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응대하고 있었다.
이서준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종이 딸랑 울렸다.
"저기."
"어, 서준아?"
윤하늬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담배 찾던 손님을 보내고 막 계산대로 돌아온 참이었다.
"여긴 왜?"
"삼각김밥 사러."
거짓말이었다.
그는 삼각김밥을 먹지 않았다.
편의점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는 게 평소 습관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럴듯한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 그래?"
윤하늬는 별다른 의심 없이 냉장고를 가리켰다.
"저기 참치마요랑 불닭 있어. 뭐 좋아해?"
"둘 다 안 좋아하는데."
"그럼 그냥 아무거나 골라."
이서준은 아무거나 하나 집어 계산대로 갔다.
포장지도 제대로 안 보고 그냥 손에 잡히는 걸 들었다.
"너 여기서 알바 하는 거였어?"
"응, 뭐. 용돈 벌이지."
"학교에서는 몰랐네."
"말 안 했으니까."
짧은 대답이었다.
더 캐물으려는 순간, 계산대 위 유리 진열장에 놓인 명함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이서준의 것이었다.
아까 급하게 지갑을 넣다가 흘린 모양이었다.
박 기사와 이야기하며 정신없이 옷매를 만지다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
검은 명함 위에 금박으로 새겨진 글자가 선명했다.
'명성그룹 이서준.'
윤하늬의 시선이 그 글자에 잠깐 머물렀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이서준의 눈에는 그 몇 초가 마치 슬로모션처럼 늘어져 보였다.
이서준은 재빨리 손을 뻗어 명함 지갑을 낚아채듯 집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만큼 세게 쥐었다.
"이거 내 거 아니야."
"어? 방금 네 주머니에서……"
"친구가 준 거야. 이상한 장난 명함 만드는 앱 있잖아."
말이 되지도 않는 소리를 급히 갖다 붙였다.
윤하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게 있어?"
"응, 요즘 유행이야. 이름 아무렇게나 넣으면 회사 이름도 마음대로 넣어주고."
"신기하네. 나도 하나 만들어볼까."
"그, 그럴 필요 없어. 별로 재미없어."
이서준은 손사래를 치며 명함 지갑을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윤하늬는 더 묻지 않고 삼각김밥을 봉투에 넣어 건넸다.
"이천이백 원."
이서준은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 리더기에 카드를 꽂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괜찮아. 이건 그냥 카드일 뿐이야.'
결제 화면에 이름이 뜨는 순간, 윤하늬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멈췄다.
카드 위에 새겨진 이름도 같았다.
이서준 명성그룹.
화면에 뜬 글자와 카드 위의 글자가 정확히 겹쳤다.
이서준은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관자놀이가 다시 욱신거렸다.
'이건 눈치챘겠는데.'
윤하늬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어쩌면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한순간의 일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윤하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봉투를 마저 건넸다.
"조심히 가."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였다.
너무나도 평소와 다름없어서, 그게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서준은 봉투를 받아 들고 편의점을 나섰다.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가, 뒤를 돌아보니 유리문 너머로 그녀가 다시 계산대 앞에 서서 다음 손님을 맞고 있었다.
웃는 얼굴이었다.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고, 봉투를 챙겨주는 몸짓 하나까지 평소와 똑같았다.
그러나 그 웃음이 아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눈은 웃고 있지 않은, 그런 얼굴.
마치 뭔가를 알아버린 사람의 표정 같았다.
이서준은 그 자리에 얼마간 서 있었다.
손에 든 삼각김밥 봉투가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설마.'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설마 눈치챘을까.'
그러다가 이내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착각이었을 거야.'
하지만 걸음을 옮기는 내내,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편의점 유리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어쩐지 다시는 아까처럼 편하게 웃어주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