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일주일 뒤, 학교는 체육대회 준비로 시끄러웠다.
복도마다 물감 냄새가 진동했고, 창문마다 색색의 플래카드가 나붙었다.
반마다 응원 도구를 만들고 단체 티셔츠를 맞추느라 분주했다.
윤하늬는 반 대표로 학급 티셔츠 디자인을 맡았고, 이서준은 얼떨결에 물품 담당이 되었다.
"왜 하필 내가."
"네가 손 들었잖아."
"언제."
"반장이 물을 때 네 손이 제일 먼저 올라갔거든."
"그건 옆 애가 밀어서……"
"핑계는."
윤하늬가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봤다.
턱을 살짝 치켜든 자세가 꼭 승리를 확신한 재판관 같았다.
이서준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방과 후, 두 사람은 텅 빈 교실에 남아 종이박스를 나르고 있었다.
창밖으로 노을이 길게 늘어져 책상 사이를 붉게 물들였다.
"이거 하나만 더 들어줘."
윤하늬가 무거운 박스를 밀어 왔다.
박스 안에는 물풀과 색종이, 응원 막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무슨 박스가 이렇게 무거워."
"할 말 있으면 들고 하든가."
이서준이 받아 드는 순간 두 사람의 손이 스쳤다.
짧은 접촉이었지만 손끝이 저릿했다.
전기가 통한 것처럼 순간적으로 팔에 소름이 돋았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박스를 옮겼다.
윤하늬는 애써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고, 이서준은 박스 겉면의 글씨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조립식 응원 도구 세트'라는 글자가 무슨 대단한 문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교실 뒤편에 박스를 쌓아놓고 나서, 윤하늬가 매직펜을 들고 반티 디자인을 스케치했다.
"이서준, 넌 어떤 색이 좋아?"
"아무거나."
"그럼 형광 초록으로 할까?"
"그건 좀……"
"거봐, 아무거나 아니잖아."
윤하늬가 웃으며 스케치북에 뭔가를 끄적였다.
이서준은 그 옆얼굴을 잠깐 바라보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뭘 보는 거야, 지금.'
체육대회 날, 운동장은 함성으로 가득했다.
반티를 입은 학생들이 뛰어다녔고, 스피커에서는 응원가가 쏴아아 흘러나왔다.
천막마다 반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아이들은 물총과 부채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이서준의 반은 이인삼각 경기에 출전했다.
짝은 윤하늬였다.
제비뽑기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절묘한 우연이었다.
"야, 이거 진짜 우연이야?"
"조작한 거 아니냐고 묻는 거면, 아니야. 나도 방금 알았어."
주변에서 반 아이들이 킥킥거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윤하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애써 태연한 척 다리를 묶었다.
"손 꽉 잡아. 안 그러면 넘어져."
"어, 알았어."
이서준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손바닥에 닿는 체온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웠다.
'이게 이렇게까지 밀착해야 하는 경기였나.'
출발 신호가 울리자 두 사람은 어색하게 발을 맞춰 뛰었다.
타타닥, 발소리가 엉켰다.
"왼발! 왼발부터!"
"나 지금 왼발 냈잖아!"
"그건 오른발이었어!"
옆 조가 먼저 앞서 나가는 게 보였다.
윤하늬가 다급히 속도를 높이려 했다.
중간쯤에서 균형이 무너졌다.
윤하늬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이서준이 다급히 그녀를 붙잡으며 함께 넘어졌다.
등이 잔디밭에 닿는 순간, 그녀가 그의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숨결이 가까웠다.
풀냄새와 그녀의 샴푸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
관중석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저기 봐, 완전 로맨스 영화 아니야?"
누군가 소리쳤다.
"둘이 사귀냐!"
또 다른 누군가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윤하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놓아, 놓아."
"놓고 있어."
"안 놓고 있잖아!"
"내가 지금 널 어떻게 안 놓고 있어, 손이 다리에 묶여 있는데!"
두 사람은 허둥지둥 몸을 떼며 일어섰다.
다리를 묶은 끈이 엉켜서 하마터면 또 넘어질 뻔했다.
결국 순위는 꼴찌였지만, 반 아이들은 오히려 더 신나게 웃고 떠들었다.
"괜찮아, 순위보다 임팩트가 중요하지!"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랍시고 그런 말을 던졌다.
윤하늬는 흙 묻은 무릎을 털며 애써 웃음을 지었지만, 귀까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순간 관중석 한구석에서 이서율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 정장 차림으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이 학교 풍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주변 학부모들이 슬쩍슬쩍 그를 쳐다볼 정도였다.
담임교사가 다가와 물었다.
"학부모님이신가요?"
"동생 학교 행사가 있어서요."
담임교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지만, 힐끗 뒤돌아보는 시선이 남아 있었다.
이서율의 시선은 여전히 운동장 위, 넘어졌다 일어난 두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입가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눈빛만은 무언가를 재는 듯 서늘했다.
경기가 끝난 뒤 이서준이 물병을 가지러 가는 사이, 이서율이 조용히 다가왔다.
발소리도 없이, 마치 원래 거기 서 있었던 것처럼.
"쌤한테 걸릴 뻔했잖아, 형."
"경기 내용이 재미있더군."
"뭘 재미있어."
"손을 그렇게 잡을 필요가 있었나."
이서준의 관자놀이가 다시 욱신거렸다.
"이인삼각이잖아. 규칙이야."
"규칙이라."
이서율은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입꼬리만 올라간 형태였다.
"넘어지는 것도 규칙이었나."
"그건 사고였고."
"사고치고는 자세가 자연스럽던데."
이서준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더 대꾸했다간 말꼬리를 잡힐 게 뻔했다.
"그 애 이름이 윤하늬라고 했지."
"왜."
"조사를 좀 시켜 놨다."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뭐?"
"가정형편이 좋지 않더군."
"형, 그건……"
"아버지는 네가 평범한 여자애랑 얽히는 걸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이서율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억양의 높낮이 하나 없이,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듯이.
하지만 그 차분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이서준은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었다.
"괜한 정 주지 마라, 서준아."
말을 마친 이서율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은 운동장의 소란과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고요했다.
검은 세단이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기사가 문을 열자 이서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랐다.
세단이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걸 보면서도, 이서준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조사를 시켜 놨다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집안 형편, 성적, 아니면 그보다 더 사적인 것까지?
머릿속이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졌다.
멀리서 윤하늬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흙이 묻은 반티 자락을 대충 털어내며, 발걸음이 가벼웠다.
"뭐 해, 안 오고."
밝은 목소리였다.
"물병 가지러 간다더니 어디서 딴짓하고 있었어?"
"어, 아니. 그냥……"
이서준은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윤하늬가 가까이 다가오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이 왜 그래? 안 좋은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진짜."
윤하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다시 밝게 웃으며 그의 팔을 툭 쳤다.
"그럼 얼른 가자, 다음 경기 시작한대."
그녀가 앞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이서준은 방금 사라진 검은 세단의 방향을 다시 한번 눈으로 좇았다.
가슴 한복판에 서늘한 예감이 얹혔다.
형이 저렇게까지 나선 적은 없었다.
이번엔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직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