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완벽 미소녀는 내 여동생

2화

그날 밤, 늦은 시간에 초인종이 울렸을 때 나는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편의점에서 산 라면을 끓이려고 물을 올려놓은 참이었고,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라고는 딱히 없었으니까 옆집에서 뭔가 잘못 배달됐나 싶은 정도의 심드렁한 마음이었다. 문틈으로 삐죽 내밀어진 종이를 받아들고 내용을 읽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눈을 다시 깜빡여야 했다. 형광등 아래서 글자들이 이상하게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강제집행, 명도소송, 그런 딱딱한 한자어들이 눈앞에서 낯설게 굴러다녔다. 명도소송이라니. 서하은이. 반에서 늘 웃고 다니는, 뭐든 잘하고 뭐든 갖춘, 그래서 오히려 나 같은 애하고는 겹칠 일이 없는 그 서하은이, 지금 내 방문 앞에서 이 종이를 들고 서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학교에서 그녀는 늘 반장 옆자리에 앉아서, 선생님이 뭘 물어도 척척 대답하고, 급식 줄에서도 늘 웃으며 인사를 받는 애였다. 나와는 급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고, 나는 은연중에 그렇게 정리해두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세계의 사람이 내 앞에 서 있었다. 화장을 지운 얼굴, 부스스한 머리, 그리고 한쪽 어깨에 걸쳐진 커다란 캐리어 하나. 학교에서 보던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저기, 이상하게 듣지 말고." 그녀가 겉옷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손끝이 소매 안으로 자꾸 말려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며칠만, 아니 정말 며칠이면 돼. 방 구할 데를 알아볼 때까지만 여기……" "우리 집에서?" "응." 너무 순순히 대답하는 게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이 정도로 다급한 거구나. 보통이라면 몇 번은 더 뜸을 들이고, 몇 번은 더 망설이는 척을 했을 텐데, 그녀는 단답으로 대답하고는 내 눈치를 살폈다. 그 눈빛에 평소의 여유 같은 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생각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같은 학년, 같은 반, 이제 열일곱인 남녀가 한 지붕 아래서 지내는 것. 학교에 소문이 나면 어떻게 될지, 그녀의 이미지에 어떤 흠집이 갈지, 그리고 솔직히 말해 나 자신은 이 상황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열일곱 살 남자애한테 이건 시험이라기보다는 재난에 가까웠다. 머릿속으로 온갖 경우의 수가 스쳐 지나갔다. 누가 우리를 보면 뭐라고 할까. 소문이 어디까지 부풀려질까. 그리고 정작 나는, 이 애를 매일 아침저녁으로 마주치면서 아무 일도 없는 척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문을 닫지 못했다. 종이에 찍힌 강제집행이라는 두 글자와, 그걸 들고 있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완벽하다고 소문난 애가 이 시간에, 이런 얼굴로 남의 집 앞에 서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갈 곳이 없는 거다. 정말로, 갈 곳이 하나도 없는 거다. "들어와." 말이 먼저 나갔다. 계산은 그 다음이었다. 그녀가 캐리어를 끌고 좁은 현관을 넘어서는 순간, 바퀴가 문턱에 걸려 작게 덜컹거렸다. 그 소리마저도 이 상황이 얼마나 급작스러운 건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방 안에 그녀의 짐이 하나둘 자리를 잡는 걸 보면서, 나는 속으로 규칙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건 동거가 아니다. 임시 보호다. 서하은은 여자가 아니라, 갈 곳 없는 후배다. 아니, 후배도 아니고 동급생이니까, 그냥…… 여동생. 그래, 여동생으로 생각하면 된다. 말이 안 되는 논리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 말을 되뇔수록 마음이 편해졌다. 여동생. 여동생이면 늦은 밤에 같은 공간에 있어도 괜찮고, 여동생이면 그 애가 세수하고 나온 얼굴을 봐도 아무 감정이 없어야 하고, 여동생이면 자다가 뒤척이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이번 생은, 아니 이 상황은, 그렇게 넘어가야만 했다. 캐리어에서 나온 짐들은 생각보다 단출했다. 교복 몇 벌, 세면도구, 그리고 손바닥만 한 인형 하나. 그 인형을 보는 순간,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완벽한 서하은도 결국은 열일곱 살짜리 애였구나. "규칙 몇 개만 정하자." 나는 일부러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목소리에 힘을 조금 더 실었다. "화장실 순서, 청소 당번, 그리고……" "오빠, 나 요리 진짜 못하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빠라는 호칭이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와서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아, 이 애도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구나. 오빠와 동생. 그게 우리 둘 다에게 가장 안전한 이름이라는 걸, 서하은도 알고 있었다. "그럼 뭘 잘하는데?" "음…… 설거지?" "그건 요리가 아니라 뒤처리잖아." "그러니까 설거지는 내가, 요리는 오빠가."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이상한 논리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냥 웃음이 나와서, 픽 하고 짧게 웃어버렸다. 그녀도 그제야 조금 안심한 얼굴로 따라 웃었다. "밥은 내가 할게." "진짜?" "어차피 내가 해 먹던 거야." 그녀의 표정이 순간 환해졌다가, 곧 미안한 기색으로 바뀌었다. 그 표정의 전환이 너무 빨라서, 나는 그 애가 학교에서 짓는 완벽한 미소와는 다른 얼굴이라는 걸 알아챘다. 학교에서의 서하은은 늘 정돈된 웃음이었는데, 지금 이 얼굴은 조금 어설프고, 조금 날것이었다. "고마워." 그녀가 작게 말했다. "정말로." "됐어. 대신 청소는 네가 해." "콜." 너무 쉽게 대답하는 게 우스웠지만, 나는 그냥 넘어갔다. 이 상황에서 뭘 더 따지고 든들 달라질 것도 없었다. 첫날 밤, 나는 거실에 이불을 깔고 그녀에게 방을 내주었다. 원룸이라 방이 따로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커튼으로 공간을 대충 나누고, 나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자리에 누웠다. 형광등을 끄자 방 안은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만 남았고, 그 빛이 천장에 희미한 줄무늬를 그렸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고, 나는 그 소리에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걸 억지로 눌러 삼켰다. 커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람이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크게 느껴질 일인가 싶었다. 여동생이다. 여동생이다. 속으로 몇 번을 되뇌었는데도, 그날 밤 나는 유난히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커튼 너머로 그녀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이불을 괜히 다시 끌어당기며 애먼 곳에 신경을 쏟았다. 문제는, 그 이유를 나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는 거였다. 새벽 어느 순간, 커튼 너머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는 척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불안한 떨림이, 이불 속에서까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 애는 지금, 대체 어떤 밤을 보내고 있는 걸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지만, 물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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