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만 챙겨달라며?

2화

[강도훈 시점] 새벽 여섯 시.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고, 방 안 공기는 서늘했다. 이불을 걷어내는 순간 발바닥에 닿는 장판의 냉기가 낯설지 않았다. 십 년 넘게 반복해온 아침이었다. 나는 곧장 부엌으로 갔다. 도마 위에 계란을 깨는 소리, 팬이 달궈지는 냄새. 익숙한 순서였다. 계란말이, 멸치볶음, 그리고 사과. 사과는 토끼 모양으로 깎아야 한다. 칼끝으로 껍질을 얇게 벗겨내고, 하얀 속살에 두 개의 뾰족한 귀를 만들어내는 그 손동작은 이제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소이가 그걸 좋아한다고 말한 게 벌써 몇 년 전인지 모르겠다. 사실을 말하자면, 소이가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딱 한 번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급식소에서 우연히 옆자리 아이의 도시락에 토끼 사과가 있었는데, 소이가 그걸 보며 예쁘다고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를 나는 지금까지 잊지 않고 지켰다. 그게 이상한 일인지, 나는 그때는 몰랐다. 어쩌면 지금도 모르는 것 같다. 계란말이를 도시락통에 담다가 나는 잠깐 손을 멈췄다. 오늘따라 사과를 깎는 손이 무겁게 느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어제와 다른 무언가가 내 안에 스며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 나는 그 느낌을 무시하고 마지막 사과 조각을 도시락통 구석에 밀어 넣었다. 도시락을 다 싼 뒤, 나는 어제 정리해둔 수학 문제집을 다시 펼쳤다. 소이의 시험 범위는 매번 내가 직접 확인했다. 소이는 프린트를 잘 챙기지 못했고, 담임의 공지사항도 자주 놓쳤다. 그래서 나는 매번 칠판을 사진으로 찍어두고, 밤에 다시 손으로 정리해서 쪽지를 만들었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소이가 며칠 전 수학 시험지를 반쯕으로 접어 가방 깊숙이 넣어버렸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60점. 소이는 부끄러워했고, 나는 그날 밤 늦게까지 문제집을 파고들어 오답 유형을 정리했다. 다음 시험에서 소이가 웃는 얼굴로 시험지를 흔들어 보였을 때, 나는 그 웃음 하나로 며칠 밤의 피곤이 다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교실에 도착했을 때, 소이는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책상 위에 도시락 가방을 올려두고, 오늘 아침에 만든 쪽지를 그 위에 얹었다. 쪽지에는 빨간 펜으로 시험 범위와 함께 자주 틀리는 유형을 표시해두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소이가 늦게 오는 건 예상 범위 안이었다. 열 번 중 아홉 번은 늦었으니까. 창밖으로 아이들이 하나둘 등교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창턱에 팔을 괴고 앉아 교문 쪽을 살폈다. 소이의 걸음걸이는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가방을 한쪽으로만 메고 뛰는, 언제나 급한 걸음. 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안심하곤 했다. 오늘도 무사히 왔구나. 그런 안심이었다. 소이가 헐떡이며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오늘도 지각을 겨우 면했구나. 그런 안심이었다. "늦었네." 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굳이 얼굴을 볼 필요가 없었다. 이미 소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고 있었으니까.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고, 그리고 곧 웃어버릴 표정. "알람을 세 번이나 눌렀는데 왜 이렇게 안 일어나는지 모르겠어." 소이가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도시락 가방을 슬쩍 밀었다. 소이의 손끝이 그 가방에 닿는 걸 보며, 나는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가겠구나 생각했다.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나는 몇 분 뒤에 알게 되었다. 소이는 가방을 열어보지도 않고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만졌다. 나는 그 옆에서 조용히 노트를 펼쳤다. 아직 시작종이 울리기까지는 십오 분쯤 남아 있었다. 교실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어제 본 예능 얘기를 하고, 누군가는 숙제를 베끼고 있었다. 그 평범한 풍경 속에서 나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한준이 다가온 건 그때였다. 한준은 뒷문 쪽에서부터 걸어와 소이의 책상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도시락 가방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야, 오늘도 도시락이네. 도훈이 진짜 대단하다." 한준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냥 웃어넘길 생각이었다. 늘 듣던 놀림이었으니까. 반에서 몇몇 아이들은 종종 나를 두고 그런 식으로 놀렸다. 엄마냐, 매니저냐, 그런 가벼운 말들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도시락 싸주고, 시험 범위 정리해주고. 야, 이거 완전 남편 아니냐?" 한준이 말을 이었다. 교실 안 몇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냥 웃어넘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편이라는 말을 꺼낸 순간, 나는 뭔가가 목 안쪽에서 뻣뻣하게 굳는 걸 느꼈다. 남편처럼 챙긴다. 그 말이 웃겼던 건, 그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소이를 위해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고, 시험 범위를 정리하고, 준비물을 챙겼다. 그건 십 년 넘게 이어온 습관이었고, 나는 그 습관을 사랑이라고 부를 자신도, 아니라고 부정할 자신도 없었다. 그냥 해왔던 일이었다. 소이가 필요로 하니까, 소이가 나 없이는 자꾸 뭔가를 놓치니까. "뭐래."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갈라진 것 같았다. 나는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한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진짜잖아. 소이 너 좋겠다. 이런 남편 하나 있으면 학교 다니기 편하겠네." 교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소이의 얼굴을 살폈다. 소이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는 걸 보았다. 처음엔 당황, 그다음엔 뭔가를 참아내려는 듯한 표정, 그리고 마지막엔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소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했어야 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했다. 소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과보호야, 그만해." 그 말이 귀에 닿는 순간, 세상이 잠깐 멈춘 것 같았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뛰었고, 위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소이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소이는 나를 보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교실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몇몇 아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쏟아졌다. 그 시선들 속에서 나는 혼란, 그다음엔 부끄러움, 그리고 마지막엔 알 수 없는 서늘함을 느꼈다. 소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교실의 정적 속에서는 유독 또렷하게 울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반박할 말도, 사과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등 뒤에서 웅성거림이 계속되는 걸 들었다. 그 소리가 마치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확실하지 않았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복도로 나와서야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나는 손바닥을 몇 번이나 폈다 오므렸다. 창문 너머로 운동장이 보였다. 몇몇 아이들이 체육 수업을 준비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평범한 풍경이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태연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과보호.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나는 지금까지 그걸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이는 그걸 과보호라고 불렀다. 배려와 과보호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멀었던가. 아니면 처음부터 그 거리는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소이를 위한 것이라고 믿었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날 처음으로 스쳐 지나갔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에 손을 짚고 한동안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은 낯설었다. 무표정한, 그러나 어딘가 무너져 있는 얼굴이었다. 눈 밑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나는 그게 눈물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피곤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수도꼭지를 틀어 손에 물을 받아 얼굴에 몇 번 끼얹었다. 물은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잠시 머릿속을 씻어내는 것 같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수업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나는 교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보건실로 향했다. 보건 선생님은 자리에 없었고, 나는 커튼을 치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형광등 불빛이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열 살, 열한 살, 열두 살, 소이와 함께했던 수많은 아침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소이가 준비물을 놓고 울먹였던 날, 내가 대신 뛰어가 사왔던 날. 그날 비가 왔었고, 나는 우산도 없이 문구점까지 뛰어갔다가 흠뻑 젖어서 돌아왔다. 소이는 그런 나를 보고 웃었고, 나는 그 웃음이면 됐다고 생각했다. 소이가 시험을 망치고 눈물을 흘렸던 날, 내가 다음 시험 범위를 미리 정리해줬던 날. 소이가 친구와 다투고 혼자 급식실 구석에 앉아 있던 날, 내가 옆에 가서 아무 말 없이 밥을 나눠 먹었던 날. 그 모든 순간들이 배려였는지, 제어였는지, 나는 그날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소이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당연했기에, 나는 그 필요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혹은 내가 그 필요를 만들어낸 건 아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소이는 정말로 나 없이는 프린트를 못 챙기는 걸까. 아니면 내가 항상 대신 챙겨줬기 때문에, 소이가 챙기는 법을 배울 기회조차 갖지 못한 걸까. 그 질문은 답이 나오지 않는 채로 계속 맴돌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이 뜨거웠다. 집에 돌아온 그날 밤, 나는 도시락통을 씻어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평소라면 다음 날 아침에 쓸 반찬을 미리 준비해두었을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냉장고 문을 오래 열어둔 채 서 있다가, 결국 아무것도 꺼내지 않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통을 다시 꺼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적어도 지금은. 밤늦게까지 나는 잠들지 못했다. 휴대폰 화면을 몇 번이나 켰다가 껐다. 소이에게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아니면 그냥 안부를 묻는 말 한마디라도. 그러나 화면은 조용했다. 나는 그 조용함을 견디며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십 분 늦게 일어났다. 계란도, 사과도 깎지 않았다. 부엌은 조용했고, 도마 위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그 낯선 조용함이 오히려 귀에 크게 울렸다. 교실에 도착했을 때, 내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늘 있던 도시락 가방도, 쪽지도 없었다. 그 빈 책상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소이가 도착해서 내 옆자리에 앉았을 때도,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곁눈질로 소이의 가방이 놓이는 소리, 의자가 끌리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오늘 도시락 없어?" 소이가 물었다. 목소리에 당황이 섞여 있었다. "응." 나는 짧게 대답했다. "시험 범위는..." "몰라." 그게 전부였다. 소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소이가 몸을 살짝 뒤척이는 소리, 가방 지퍼를 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지만, 나는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십 년 넘게 지켜온 순서가 무너진 자리에, 무엇이 채워질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저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감각만이 선명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담임이 교실로 들어오며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대답 소리가 이어졌다. 내 이름이 불리고,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 다음, 소이의 이름이 불렸다. 대답이 없었다. 담임이 다시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나는 저절로 고개를 돌렸다. 소이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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