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고에 남자는 나 하나뿐

4화

체육 시간이었다. 운동장에 모이자마자 등에서부터 땀이 뱄다. 여름도 아닌데 이상하게 손끝이 차가웠다. 운동복 치마 밑으로 드러난 다리를 나도 모르게 자꾸 내려다봤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도 이 옷이 어색했다. "오늘은 반별 이어달리기 예선이야!" 체육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손뼉을 쳤다. 운동장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이 웅웅 울렸다. "3반, 대표 뽑아서 앞으로 나와." 애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틈에 소율이 내 등을 툭 쳤다. "저요?" 내가 놀라서 물었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당연하지, 우리 반 대표잖아." 소율이 씩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억지로 밀어붙이는 손길이었다. "저 뛰는 거 잘 못해요..." 거짓말이었다. 완전한 거짓말. 사실 남자였을 때 육상부였다. 트랙 위에서 스펀지처럼 시간을 삼키던 기억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너무 잘 뛰면 이상하게 보일까 봐 걱정됐다. 평범한 여학생이, 이렇게까지 빨리 달릴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하는 만큼 해." 하은이 짧게 말했다. 눈빛에서 뭔가 알고 있다는 느낌이 났다. 저 눈, 저 눈이 문제였다. 마치 내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하지만 확인할 틈이 없었다. 선생님이 벌써 명단을 부르고 있었다. "자, 대표 나온 사람들 이쪽으로!" 다른 반 대표들이 하나둘 트랙 앞에 줄을 섰다. 다들 몸을 풀며 스트레칭을 했다. 나도 어색하게 다리를 뻗었다. 근육이 오랜만에 늘어나는 느낌이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출발선에 섰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 정도 긴장은 오랜만이었다. 예전엔 이 심장 소리가 설렘이었는데, 지금은 불안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방향이 달랐다. 옆 레인에 선 애가 나를 힐끗 쳐다봤다. "3반 애 처음 보는데. 잘 뛰어?" 대답할 틈도 없었다. "준비-" 체육 선생님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나는 무릎을 살짝 굽히고 발끝에 무게를 실었다. 몸이 알고 있었다. 이 자세, 이 각도.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준비를 끝냈다. "땅!"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다리가 튀어 나갔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게, 스텝을 짧게 짧게. 팔은 힘을 빼고, 시선은 정면. 몸에 새겨진 습관이 나를 대신 뛰고 있었다. 머리로는 자꾸만 속도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옆에서 뛰던 애들이 시야에서 하나둘 사라졌다. 아, 이건 아닌데. 좀 천천히 뛰어야 하는데. 근데 몸이 이미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눌러놨던 스프링이 튕겨 나가는 것처럼. 결승선을 통과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허리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헐..." 주변에서 탄성이 터졌다. "쟤 뭐야, 진짜 빠른데?" "3반 애 이름이 뭐야?" 다른 반 애들까지 몰려와 나를 쳐다봤다. 시선이 온몸에 꽂혔다. 아, 망했다. 너무 잘 뛰었다. 체육 선생님도 눈을 크게 뜨고 스톱워치를 다시 확인했다. "이거 기록 확실해? 다시 재봐." "괜히 튀었네." 혼자 중얼거렸다. 숨을 몰아쉬며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손끝이 떨렸다. 긴장이 아니라, 후회 때문이었다. 하은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운동 신경 좋으시네요."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그 안에 숨은 질문이 느껴졌다. 어떻게 이렇게 빠르냐는 질문이. "어... 그냥 어릴 때 좀 뛰었어요." 말을 흐렸다. 시선을 피하며 운동화 끈을 괜히 고쳐 맸다. 하은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캐물지 않는 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저렇게 넘어가는 사람일수록 뒤에서 더 많은 걸 알아채고 있는 법이니까. *** 오후, 반 애들이 몰려와 나를 둘러쌌다.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였다. "어떻게 그렇게 빨라?" "체력 관리 어떻게 해?" "학원 다녀? 아니면 원래 운동선수였어?" 질문이 쏟아졌다. 하나씩 대답하기도 전에 다음 질문이 밀려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충 대답했다. "그냥... 타고났나 봐요." 말이 되지도 않는 대답이었지만, 애들은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다들 순수하게 감탄만 하고 있었다. 의심하는 눈치는 없었다. 그게 더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소율이 팔을 벌려 애들을 막았다. "자자, 그만 그만! 도현이 힘들어!" "과도한 접근 금지 규칙이지." 지우가 옆에서 웃으며 거들었다. 팔짱을 낀 채 애들을 슬쩍 밀어내는 손짓이 능숙했다. "뭔 규칙이 그렇게 많아." 누군가 투덜대며 웃었다. "내가 만든 규칙이니까 내가 정해." 소율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애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로 흩어졌다. 애들이 흩어지자 지우가 다가와 종이백을 건넸다. 손끝에서 은은한 버터 냄새가 먼저 풍겼다. "이거, 오늘 만든 거야." "또요?"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이 학교에 온 이후로 지우한테 뭔가 받은 게 손으로 다 못 셀 지경이었다. "쿠키. 뛰느라 힘들었을 것 같아서." 종이백을 열었다. 버터 향이 확 올라왔다. 노릇하게 구워진 쿠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고마워요." 한 개를 집어 먹었다. 부드럽고 달았다. 입안에서 바스락 부서지며 버터 맛이 퍼졌다. "맛있어요, 진짜." "다행이다." 지우가 손끝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살짝 넘겼다. 그 동작이 이상하게 계산된 것처럼 보였는데, 나는 그냥 넘겼다.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근데 그렇게 빨리 뛸 줄은 몰랐어. 놀랐잖아." "저도 놀랐어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나 자신도 몸이 그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으니까. 마음의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게 느껴졌다. 처음엔 낯설고 무서웠던 이 학교가, 이제는 조금씩 편안해지고 있었다. 쿠키 하나에, 웃음 하나에, 아무렇지 않게 던져지는 다정함에. 이대로 괜찮은 건가. 이렇게 편해져도 되는 건가.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지만, 답을 찾기도 전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근데 도현아." 하은이 나를 불렀다. 표정이 조금 전과 달랐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었다. "네?" "오늘 너무 튀어서... 이사장님한테 소문 들어갈 수도 있어." 순간 웃음이 멈췄다. 쿠키를 삼키던 목이 뻐근하게 굳었다. "이사장님이요?" "응. 학교에서 특이한 일 생기면 바로 보고 들어가." 심장이 다시 쿵, 내려앉았다. 지우도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의 변화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보고요? 그런 게 왜..." 물으려는데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쿠키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은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냥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에 뭔가가 담겨 있었는데, 그게 뭔지 알아낼 시간도 주지 않고 종이 울렸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사장님이라는 이름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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