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신이 혼약자가 되어달란다

1화

봄바람이 유난히 차게 부는 3월 초, 나는 한빛고등학교 복도 창가에 서서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갈 하루를 마음속으로 미리 그려보고 있었다. 유리창에 이마를 살짝 대자 서늘한 기운이 피부로 전해졌는데, 그 차가움이 오히려 익숙해서 마음이 놓였다. 특별할 것도 없고 눈에 띌 것도 없이, 그저 조용히 존재하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고, 그런 나 자신을 매번 확인할 때마다 가슴 한쪽이 시큰거리는 걸 느끼면서도 애써 무시하는 것도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복도를 지나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사물함 문이 쾅 닫히는 소리, 저 멀리서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까지도 나와는 상관없는 배경음처럼 흘러갔고, 나는 그 속에서 늘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사람이었다. 왜 나는 늘 이런 식으로 나를 깎아내리는 걸까, 하는 물음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그 답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오늘도 그냥, 이렇게 지나가겠지. 1학년 3반 교실로 들어서는 길, 복도 저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중심에는 늘 그렇듯 차은서가 있었다. 금발과 푸른 눈, 남들과는 확연히 다른 이국적인 외모 때문에 첫날부터 학교 전체의 시선을 끌었던 아이였고, 동시에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아 '고독한 여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가 지나가면 복도의 소음이 순간적으로 잦아들었다가 다시 커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그 정도로 그녀의 존재감은 이 학교 안에서 절대적이었다. 나는 그녀와 접점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날 아침까지도 그녀의 이름조차 제대로 외우지 못한 상태였다. 같은 학년이라는 것, 늘 혼자 앉아 창밖을 본다는 것, 그 정도의 조각난 정보만이 내가 아는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하필 그날, 도서실 앞에서 마주친 건 정말 우연이었다. 나는 반납할 책을 옆구리에 끼고 걷다가 모퉁이를 돌았을 뿐인데, 그 자리에 그녀가 서 있었다. 그녀가 팔에 안고 있던 하드보일드 소설 몇 권이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지는 걸 보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책을 주워 올렸는데, 손끝에 낡은 표지의 질감이 닿는 순간—종이 냄새가 훅 끼쳐오는 순간—그녀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심장이 툭, 내려앉았다. 그 시선이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향해 있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서, 나는 책을 다 줍고도 한동안 허리를 펴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같은 흔한 인사말이라도 기대했던 나와 달리,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하기만 했고, 그 눈빛이 너무 곧고 깊어서 나는 저절로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복도의 형광등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리던 순간이었다. "저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는데, 억양 어딘가에 낯선 리듬이 섞여 있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죽였다.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둔 말을 이제야 꺼내는 사람처럼, 그녀의 목소리에는 조급함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이름이 뭐야?" 반말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것도 여신이라 불리는 그녀에게서 나올 거라고 생각지 못한 말투였고, 나는 얼떨결에 이름을 말해버렸다. "정하준인데요…" 말끝이 흐려지는 걸 스스로도 느끼면서, 도대체 왜 존댓말이 나오는지 알 수 없어 손끝이 저릿했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의 무게가 갑자기 몇 배는 무거워진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이름을 몇 번 곱씹듯 되뇌더니—정하준, 정하준—마치 오래전부터 정해두었던 대답을 꺼내는 사람처럼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정하준, 나랑 혼약자가 되어줘." 순간 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혼약자? 이 낱말이 지금 이 복도에, 이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인가 싶어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는데, 그녀의 표정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진지했다. 주변을 지나가던 아이들 몇이 흘긋 이쪽을 쳐다보는 것도 느껴졌지만, 그녀는 그 시선들을 신경 쓰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럴 리가." 나는 겨우 그 말만 뱉었다.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게 그나마 정신을 붙잡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으니까. "장난 아니야." 그녀는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고, 그 순간의 눈빛이 얼마나 확고했는지, 나는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림 하나 없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파란빛이 형광등 아래서 더 짙게 보였다. "형식상이야. 서로 편해. 조건 나쁘지 않을 텐데." 조건이라니, 결혼을 계약처럼 말하는 그녀의 태도가 지나치게 사무적이어서 오히려 더 소름이 돋았다. 마치 미리 짜놓은 계약서를 읊는 것처럼, 그녀의 말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과, 도대체 왜 나에게, 라는 물음이 동시에 치솟아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왜, 하필, 나야. "저는… 그런 거 할 이유가 없는데요." 애써 침착하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갈라졌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나에게, 학교 전체가 주목하는 그녀가 이런 제안을 할 이유가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고, 혹시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스쳤다. 재산 문제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방패가 필요한 걸까, 온갖 짐작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느 것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 거절을 예상했다는 듯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웃음이 처음이자 유일하게 본 그녀의 표정이었는데, 서늘하면서도 어딘가 슬픈 구석이 있어서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 미소 속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읽어내려 애썼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이유는 나중에 말해줄게." 그녀가 몸을 돌리며 남긴 말이었다. 그 뒷모습이 얼마나 단단해 보였는지, 나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를 붙잡을 어떤 말도 떠올리지 못했다. "근데 하준아, 넌 이미 나랑 약속했었어."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고,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방금 들은 말을 몇 번이나 되짚었다. 약속이라니, 나는 그녀를 오늘 처음 봤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서 나는 그저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복도 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손에는 여전히 그녀가 떨어뜨렸던 책 한 권이 남아 있었는데, 낡은 표지 위로 지문이 몇 개나 겹쳐 있는 걸 보고서야 그 책을 돌려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복도의 종소리가 울렸고, 아이들이 하나둘 교실로 들어가기 시작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방금 있었던 일이 정말 현실인지, 아니면 잠깐 낮잠에서 깬 것처럼 어딘가 뒤틀린 꿈의 조각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손에 남은 책의 무게만이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유일한 증거였고, 나는 그 사실이 오히려 더 두려워졌다. …약속이라니. 나는 정말, 그녀를 알지 못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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