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신이 혼약자가 되어달란다

3화

복도 한가운데서 정면으로 마주친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을 쉬는 법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발밑이 갑자기 사라진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밀려오는 이상한 무게감. 몇 년 만인지 헤아려볼 새도 없이 그녀의 존재가 눈앞에 실체로 나타났다는 사실만이 나를 압도했고, 심장은 곧바로 요란하게 뛰기 시작해 관자놀이까지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복도를 지나가던 학생들의 말소리, 사물함 여닫는 소리, 저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까지도 순간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다. 한지수는 여전했다. 아니, 여전하다는 표현조차 부족할 만큼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학생회 임원 배지를 단정하게 단 채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농구부 특유의 그늘 하나 없는 건강한 갈색 피부와 짧게 정리된 머리, 그리고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그 눈빛까지도. 어깨를 펴고 걷는 걸음걸이마저 예전보다 더 자신감 있어 보였는데, 그 자신감이 나를 향한 무언가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게 다가왔다. 그녀는 나를 알아본 듯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이내 표정을 지운 채 그대로 옆을 지나쳐 갔다. 아무 말도 없이. 인사조차 없이. 그 무심함이 오히려 나를 더 세게 후려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밀려와 침을 삼켜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끼며 나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럴 리가.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다는 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아니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녀는 그렇게 스쳐 지나갔다. 중학교 1학년 겨울,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우리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 같은 고등학교에 배정됐다는 걸 알았을 때도 나는 애써 모른 척했고, 그녀 역시 같은 방식으로 나를 지워낸 것처럼 보였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급식실에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시선을 피했고, 그렇게 3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서로의 존재를 알면서도 철저하게 무시하는 그 관계가, 어쩌면 우리 둘 다에게 가장 안전한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를 다시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니까. 굳이 그날의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되니까. 그날 오후,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버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풍경들도 오늘은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고, 나는 이어폰도 꽂지 않은 채 그저 창에 머리를 기댄 채 흔들리는 몸을 내맡겼다. 어머니는 회사에서 늦게 돌아오는 날이라 집은 조용했고, 나는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도대체 오늘 하루 왜 이렇게 많은 게 한꺼번에 밀려온 건지, 스스로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혼약 제안, 소문, 그리고 지수까지. 세 가지가 머릿속에서 뒤엉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붙잡을 수가 없었다. 차은서의 그 태연한 목소리가, 아직 유효해, 라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가, 곧이어 지수의 무표정한 얼굴이 그 위로 겹쳐졌다. 나는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눌렀지만 두통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였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돌아온 어머니는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나를 힐끗 보더니,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내가 아무리 태연한 얼굴을 하려 해도 그 미세한 균열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짧게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어머니는 쉽게 넘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소파에 앉으며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 눈빛에는 이미 확신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무슨 여자애가 너한테 관심 있다고, 그것도 혼약 얘기까지 나왔다던데." 어머니가 소파에 앉으며 툭 던진 말에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벌써 어머니 귀에까지 들어갔다니. 도대체 이 학교는 소문이 얼마나 빠른 건지, 나는 손끝이 떨리는 걸 감추려 애써 무심한 척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오해가 있었어요." "오해?" 어머니의 눈빛이 날카롭게 좁혀졌다. 이혼 후로 어머니는 나에 대한 것이라면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 없는 집에서 나를 혼자 키운다는 책임감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시선이 나에게는 늘 무거운 압박으로 다가왔다. 어머니가 나를 걱정하는 방식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부드러운 말 한마디보다 먼저 날카로운 질문이 앞섰고, 그 질문 뒤에 숨겨진 불안은 늘 뒤늦게야 느껴졌다. "차은서라는 애가… 형식상 혼약자가 되어달라고 했어요. 근데 저는 거절했고요." 사실대로 말하는 게 오히려 낫겠다 싶어 털어놓았지만, 어머니의 표정은 더 복잡하게 굳어갔다.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두어 번 두드리던 어머니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차은서? 그 혼혈이라는 애 말이야?" 어머니가 재차 물었고, 나는 그 반응에서 이미 짐작하고 있던 불안이 현실이 되는 걸 느꼈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 "그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알아?" 어머니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낮아진 목소리가 오히려 더 무겁게 방 안을 채웠다. "차씨 그룹, 거기 딸이야. 그런 애가 왜 너한테…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하준아, 이런 건 절대 얽히면 안 돼."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걱정과 경계가 뒤섞여 있었고, 나는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떨어뜨렸다. 절대 안 돼, 라는 그 말이 유독 무겁게 가슴에 얹혔다. 나는 이미 거절했다고,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나 스스로도 그 제안이 완전히 끝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직 유효해, 라던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그 목소리에는 여유가 있었다. 마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거라 확신하는 사람의 여유. 그게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 나를 응시하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며 짧게 한마디를 남겼다. "저녁 먹고 일찍 자. 내일도 학교 가야 하니까."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긴장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나는 고개만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날 밤 나는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가 다시 뜨기를 반복했고, 시계 초침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방 안을 채웠다. 오늘 하루 벌어진 모든 일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이며 나를 짓눌렀고, 그중에서도 유난히 선명하게 남는 건 지수의 무심한 옆얼굴이었다.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그 얼굴이, 오히려 그 어떤 원망의 말보다도 나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는 걸,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하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왜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지나갔는지, 왜 나는 그 뒷모습 하나에 이렇게까지 흔들리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든 건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다음 날 등굣길, 교문 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그 얼굴과 마주쳤다. 아침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던 그 순간, 교문을 지나 들어오던 나는 저 앞에 서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고, 그 걸음이 이번만은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심장이 다시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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