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정원의 벤치에 앉아 반 시간을 기다렸다.
벤치는 딱딱했고 등받이는 낮았다. 이런 걸 우아하다고 부르는 게 이 세계 귀족들 감성인 모양이었다. 현대에서 캠핑 의자 하나만 가져와도 이거보단 편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손끝으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시간을 때울 게 없으니 별생각을 다 하게 된다.
오유나는 늦었다. 늦는 사람치고 상습적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삼 년을 알고 지냈으니 이 정도는 예상 범위 안이었다.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해가 조금씩 기울어가는 걸 보면서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뜰 수가 없었다. 오늘 이 자리는 나한테 마지막 동아줄 같은 거였으니까.
마침내 저 멀리서 하늘색 드레스 자락이 나타났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감각이 없었는데도 벌떡 일어났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유나야."
"서은 언니."
웃는 얼굴이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안심이 됐다. 아직 나를 이렇게 웃어주는 사람이 있구나. 저택 안에서 삼 년 동안 그 누구도 나한테 이런 표정을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까. 혜린이도, 아버지도, 하물며 하녀들조차도.
"무슨 일이야? 편지 보고 놀랐어."
"할 말이 있어서."
나는 아버지의 협박, 혜린의 연출, 굶주림이라는 벌까지 전부 털어놓았다. 순서 없이 쏟아냈다. 이걸 먼저 말해야 하나 저걸 먼저 말해야 하나 고민할 정신도 없었다. 말을 하는 동안 목이 메었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 상황을 말해본 것이었다.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조금 웃겼다. 이게 무슨 신파도 아니고. 근데 웃을 여유가 없었다. 목소리가 자꾸 떨렸고, 오유나는 그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표정이 진지했다. 진지해 보였다.
"그러니까,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아버지한테 한마디만이라도 좋게 해줄 수 있으면."
말을 끝내고 나서 숨을 몰아쉬었다. 뭔가를 다 쏟아낸 사람처럼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착각이었다.
오유나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처음엔 잘못 봤나 싶었다. 빛이 바뀌어서 그렇게 보이는 건가. 아니었다. 진짜로 굳어가고 있었다.
"언니."
부르는 목소리가 방금 전과 확연히 달랐다. 톤이 한 단계 낮아졌다. 이런 걸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내가 왜 언니를 도와야 해?"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다시 물어야 하나.
"뭐?"
"언니 별명이 뭔지 알아? 사교계에서. '독부'. 다들 언니 근처에 있는 사람마저 싫어해."
독부. 그 두 글자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 독부, 독부, 독부. 반복할수록 더 낯설어졌다.
"그건 혜린이가……"
"혜린 영애가 뭘 어쨌다는 거야. 착하고 순진한 애를 그렇게 몰아세우면서."
웃음이 나왔다. 이건 어이없어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진짜 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 몸이 알아서 반응하는 그런 웃음.
"너 나랑 삼 년 알고 지냈잖아."
"그러니까 잘 알지.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오유나가 부채를 펴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시선이 마치 처음 보는 벌레를 관찰하는 것 같았다. 삼 년 동안 이 애랑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지금 저 눈빛은 그 시간들을 전부 무효로 만들어버렸다.
"솔직히 나도 언니 옆에 있는 게 부담스러웠어. 내 평판까지 깎이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다니. 삼 년 동안 부담스러운 얼굴로 나랑 웃고 떠들었다는 소리인가. 배우 해도 되겠다. 이 세계에 연예계가 있었으면 대성했을 거다.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다른 영애들 몇이 서 있었다. 셋이었나 넷이었나, 세는 것도 사치스러웠다. 오유나가 미리 불러둔 것 같았다. 이 장면을 관객까지 세팅해서 연출한 거였다. 완벽한 무대였다. 나만 대본을 못 받았을 뿐이고.
"들었지? 강 영애가 도와달라고 애원했다니까."
애원. 그 단어가 화살처럼 박혔다.
"내가 애원했다고?"
"아니야? 편지까지 써서 정원으로 오라고 했으면서."
다른 영애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귓속에 박혔다. 앞으로 며칠 잠들기 전마다 그 웃음소리가 재생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불쌍하다. 아버지한테도 버림받고 친구한테도 버림받고."
누군가 옆에서 그렇게 덧붙였다. 목소리엔 진짜 동정 같은 건 한 톨도 없었다. 그냥 재밋거리를 확인 사살하는 투였다.
피가 얼굴로 몰리는 게 느껴졌다. 뭔가 반박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을 미리 준비해두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있다면 그 사람은 이런 일을 자주 겪어본 사람일 거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만나지 말자, 언니."
오유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그 말을 하면서도 표정에는 미안함 한 톨이 없었다. 부채로 얼굴 반쪽을 가린 채, 눈만 남겨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이 지금까지 봤던 오유나의 눈 중에 가장 낯설었다.
그들이 자리를 뜨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웃음소리도 함께. 드레스 자락이 스치는 소리, 구두 굽이 자갈을 밟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하나씩 멀어지다가 결국 정원엔 나 혼자 남았다.
나는 벤치에 다시 앉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데도 서 있었다. 앉으면 진짜로 무너질 것 같았다.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들어가는 일이었는데, 앉는 게 더 무서웠다.
삼 년 전 이 세계에 왔을 때 딱 하나 믿었던 게 있었다. 노력하면 관계는 만들어진다는 것. 진심으로 대하면 진심이 돌아온다는 것. 어디서 배운 건지도 모를 그 믿음 하나를 붙잡고 삼 년을 버텼다. 그 믿음이 지금 이 순간 완전히 부서졌다.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닌데, 뭔가 안에서 쩍하고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원을 벗어나 정신없이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발이 이끄는 대로 걸었더니 저택 뒤편 회랑까지 와 있었다. 이쪽으로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아서 조용했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는데 나오지 않았다. 이상했다. 이런 상황이면 울어야 정상인데, 몸이 눈물조차 만들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그냥 속에서 뭔가 계속 쿵쿵 울리기만 했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아버지한테 버림받고, 혜린이한테 몰리고, 이제 유일하게 남았다고 생각한 친구한테도 버림받았다. 이 순서를 누가 정해준 것처럼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각본을 짜놓은 것처럼.
회랑 끝에서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시야가 흐려지고 발밑이 미끄러졌다.
앞으로 쏟아지듯 넘어지는 순간,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