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녀 연기, 그만두겠습니다

5화

다가온 여자는 화려한 남색 드레스를 입은 중년 여성이었다. 드레스 자락에 은사로 수놓은 문양이 촛불에 반짝거렸다. 한눈에 봐도 몸에 걸친 것들이 전부 값나가는 물건들이었다. 목에 두른 진주 목걸이만 해도 내가 삼 년간 먹은 밥값보다 비쌀 것 같았다. 아니, 그건 좀 과장이고. 그래도 얼추 비슷할 거다. 눈매가 서준과 비슷했다. 나이는 사십대 초반쯤 되어 보였고, 표정에서 벌써 나를 향한 경계가 읽혔다. 저 눈빛,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맞다, 편의점에서 학생증 확인할 때 알바생이 짓는 표정이랑 똑같다. 딱 저런 눈으로 봤었지, 이 어린애가 진짜 성인인가 하는. "이 아가씨는?" "손목을 다치셨습니다, 숙모님." 숙모님. 그럼 이 사람이 한지원 백작부인이겠구나. 원작 기억 어딘가에서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조카를 아끼는 성격이라고 했던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등장인물 소개란에 '엄격하지만 속으로는 여린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뭐, 그런 클리셰야 어디든 있으니까. 한지원의 눈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위아래로, 마치 물건을 감정하는 눈빛이었다. 마트에서 유통기한 지난 우유 들여다보는 눈이랑 비슷했다. 아, 이 비유는 좀 심했나. 근데 진짜 그런 눈빛이었다니까. "강 영애로군." 숨이 턱 막혔다. 여기서도 알아보는구나. 이 얼굴, 이 몸, 이 이름. 아무리 도망쳐도 이 세계에서는 '강서은'이라는 세 글자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강서은입니다." 인사를 하려는데 손목이 아파서 제대로 숙이지도 못했다. 허리를 조금 굽히다가 통증에 숨을 삼켰다. 한지원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저 표정, 뭘까. 동정인가, 경멸인가. 구분이 안 됐다. "서준아, 이 애를 데리고 다닐 필요는 없다. 하녀들 시켜서 의원 부르면 될 일이야." "손목이 심하게 다쳤습니다. 지금 바로 봐야 할 것 같아서요." "강 영애 소문 못 들었니." 서준이 잠시 말을 멈췄다.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소문과 눈으로 본 건 다르더군요." 한지원의 눈이 살짝 커졌다. 조카가 자기 말을 이렇게 딱 자르고 반박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도 좀 놀랐다. 이 남자, 숙모 앞에서도 이렇게 말을 자르는구나. 성격 한번 곧네. "뭘 봤다는 거니." "이 영애가 아까 다른 영애들에게 모욕당하는 걸 봤습니다. 되받아치지도 않고, 그냥 도망치더군요." "…독부라는 소문이 있는 사람이 도망을 쳐?" "제가 볼 때는 그게 더 이상했습니다." 한지원이 나를 다시 쳐다봤다. 이번엔 좀 다른 눈빛이었다. 여전히 경계는 있었지만, 순수한 의심에서 미묘한 관찰로 바뀐 눈빛. 마치 새로 나온 신제품 리뷰를 읽는 사람처럼, '이거 진짜 광고랑 다른데' 하는 표정이었다. "강 영애." "네." "손목 좀 보여주게." 망설이다 손을 내밀었다. 부어오른 손목이 드레스 소매 밖으로 드러났다. 한지원의 눈이 순간 커졌다. "이거……" 손목만 보고도 뭔가 알아챈 듯했다.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앙상한 팔뚝, 핏줄이 다 드러나는 손. 손목 부상 말고도 눈에 보이는 게 많았을 거다. 삼 년 동안 굶기고 때리고 방치한 흔적이 이 팔 하나에 다 새겨져 있었으니까. 손목뿐 아니라 팔뚝 전체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가늘었고, 소매 사이로 드러난 살갗은 겨울 볕도 못 본 것처럼 창백했다. "영양 상태가……" 한지원이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나는 그저 시선을 피했다. 이 몸을 이렇게 관찰당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익숙하지 않은 게 아니라 부끄러웠다. 삼 년 만에 처음 느끼는 부끄러움이었다. 사람 취급 못 받는 것보다, 사람 취급 받으면서 이 몸의 상태를 들여다보이는 게 더 견디기 힘들었다. 침묵이 흘렀다. 한지원도, 서준도 말이 없었다. 마당 한구석에서 벌레 우는 소리만 들렸다. 나는 그 침묵이 너무 길어서, 차라리 누가 욕이라도 해줬으면 싶었다. 익숙한 쪽이 편했다. "일단 저희 저택으로 가시죠. 이곳 의원보다 저희 쪽 주치의가 더 낫습니다." 서준이 말했다. 한지원이 그를 힐끗 보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하자." 놀랐다. 방금 전까지 경계하던 사람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이렇게 빨리 마음이 바뀔 거였으면 처음부터 좀 곱게 봐주지. 아니, 이것도 감사할 일이지 지금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숙모님?" "손목만 보는 거다. 그 이상은 없어." 한지원이 딱딱하게 말했지만 목소리 어딘가에 이전과는 다른 온도가 섞여 있었다. 딱딱한 겉과 달리, 저 사람도 방금 본 팔뚝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표정을 숨기려는 게 오히려 더 티가 났다. 마차에 오르는 동안 나는 계속 생각했다. 이 사람들, 왜 이렇게 나를 신경 쓰는 걸까. 아버지도, 오유나도 하지 않았던 걸 이 낯선 두 사람이 하고 있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들이, 처음 본 지 한 시간도 안 된 나를 위해서. 마차 계단을 오르는데 발이 헛디뎌졌다. 이 다리도 오랫동안 제대로 걸어본 적이 없어서인지 계단 하나 오르는 것도 벅찼다. 서준이 재빨리 팔을 받쳐줬다. 그 손이 조심스러웠다. 마치 유리로 된 물건을 다루듯이. 마차 안에서 서준이 내 손목을 조심스럽게 받쳐줬다. 통증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손이 떨렸다. 좌석은 부드러웠고, 마차 안은 은은한 향이 났다. 아마 이 세계 기준으로 최고급품일 거다. 삼 년 동안 곰팡이 냄새 나는 방바닥에서 자던 사람에게는 이 향기 하나도 충격이었다. 한지원은 맞은편에 앉아서 나를 계속 살폈다. 아까와는 다른 눈빛으로.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고마웠다. "이제 안전합니다." 그가 말했다. 짧은 문장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안전하다는 말, 그 흔한 세 글자가 이렇게 무겁게 들린 적이 있었나. 삼 년 동안 그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가슴 어딘가가 시큰거렸다. 창밖으로 저택이 점점 멀어지는 게 보였다. 아버지가 정해준 세계, 혜린이 연출한 무대, 오유나가 버린 자리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저 담벼락 안에서 나는 죽지 않을 만큼만 살았다. 이제 저곳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마차가 방향을 바꾸는 순간 창밖으로 저 멀리, 어느 창문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그림자가 보였다.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혜린이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시선만은 분명히 느껴졌다. 무언가 계산하는 듯한, 차가운 시선이었다. 마차가 완전히 저택을 빠져나갈 때까지, 그 그림자는 창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전부 지켜보겠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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