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몸이 붕 뜨는 감각이 들었다.
발끝이 땅에서 떨어지고, 세상이 잠깐 기울어졌다. 넘어진다는 걸 자각한 순간엔 이미 늦었다. 원래 이런 거였나. 드라마에서 보면 슬로모션으로 처리되던데, 실제로는 그냥 순식간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 시야가 뒤집혔다.
그리고 뭔가 단단한 것에 부딪혔다. 사람이었다. 넓은 가슴, 단단한 팔. 향에서 옅은 백단향이 났다. 이런 걸 느낄 정신이 있다는 게 스스로도 웃겼다.
"괜찮으십니까."
낮은 목소리였다.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처음 보는 남자였다. 나이는 스물한 살쯤 되어 보였고, 눈빛이 유난히 맑았다. 저런 눈빛을 가진 사람이 이 사교계에 존재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여기 있는 눈들은 대부분 계산기를 눌러대느라 흐릿하거나, 아니면 나를 비웃느라 반짝이는 눈들뿐이었으니까.
순간 통증이 손목에서 폭발했다.
"악."
넘어지면서 손목을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눈앞이 하얘질 정도로 아팠다. 진통제 한 봉지가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한 봉지가 아니라 한 박스가 필요할 것 같았다. 이런 순간에 편의점 진통제 생각이 나는 나도 참 대단하다.
"손목을……"
남자가 내 손목을 살피더니 표정이 굳었다. 손끝이 조심스러웠다. 마치 깨질 물건을 만지는 것처럼.
"부러진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웃긴 건 통증보다 이 상황이 더 신경 쓰였다. 처음 보는 남자한테 안겨서, 그것도 방금 배신당한 직후 처참한 얼굴로. 눈은 분명 부어 있을 거고, 화장은 다 지워졌을 거고, 머리는 산발일 게 뻔했다. 이런 꼴로 낯선 남자 품에 안겨 있다니. 삼 년 동안 쌓아온 '냉혹한 강 영애' 이미지가 지금 이 순간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놔주세요."
"이대로 놓으면 넘어지실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뼈가 다 녹아버린 것처럼. 그래도 자존심이 있었다. 삼 년 동안 지켜온 마지막 방어선 같은 거였다.
"괜찮습니다."
일부러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연기 스위치를 켰다. 무표정, 냉소적인 말투, 딱딱한 자세. 삼 년째 하던 그대로.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연기였다. 손목이 부러진 것 같은데도 그 와중에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좀 웃기기도 했고, 좀 안쓰럽기도 했다.
남자가 나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뭔가 관찰하는 눈빛이었다. 그 시선이 묘하게 불편했다. 지금까지 나를 보던 시선들과는 종류가 달랐다.
"그렇게 아파하시면서 괜찮다고 하시면 아무도 안 믿을 겁니다."
"믿든 안 믿든 그건 그쪽 사정이죠."
"방금 우셨던 것 같은데."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이 남자, 뭐지. 사람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건가.
"안 울었어요."
"눈이 붉으신데."
"체질입니다."
말이 이상하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체질이라니. 그런 체질이 어디 있어. 남자가 짧게 웃었다. 소리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걸 보고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거짓말을 참 못 하시네요."
"뭐라고요?"
"강 영애. 사교계에서 소문난 그 강 영애 맞으시죠."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잠깐 긴장했다. 여기까지 소문이 퍼진 건가. 어떤 소문일지가 더 걱정이었다. 악녀 소문, 냉혈한 소문, 아니면 오늘 있었던 일까지 벌써 퍼진 건 아니겠지.
"그런데요."
"소문하고 다르게 아까 그 아가씨들한테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도망치시더군요. 진짜 악녀라면 되받아쳤을 텐데."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남자, 방금 그 장면을 다 봤다는 뜻이다. 내가 처참하게 무시당하고 등을 돌려 뛰던 그 순간을. 얼굴이 화끈거렸다. 손목 통증보다 이게 더 아팠다.
"…봤어요?"
"멀리서요. 도와드릴까 했는데 걸음이 너무 빠르셔서 놓쳤습니다."
빨리 뛰긴 했다. 그 순간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이렇게 넘어져서 붙잡히고 말았다. 도망도 제대로 못 치는 악녀라니, 참 볼품없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손목을 감싸 쥐었다. 통증이 다시 밀려왔다. 뼈가 어긋난 자리에서 뭔가 지끈거리는 느낌이 계속됐다. 참을 만하다고 생각했다가 다시 참을 수 없어지는, 그런 반복이었다.
"이서준입니다."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딸깍 맞춰지는 소리가 났다. 청하 변경백가. 아버지가 어제 말했던 그 이름. 정략혼 후보로 몇 번이나 언급됐던, 그런데 정작 만난 적은 없던 그 이름.
"청하 변경백의 아들이시군요."
"알고 계시네요."
"소문이 그쪽에서만 나는 게 아니라서요."
그가 다시 웃었다. 이번엔 좀 더 부드러웠다. 웃을 때 눈매가 살짝 접히는 게, 아까 그 맑은 눈빛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일단 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손목이 심각해 보입니다."
"괜찮다니까요."
"괜찮지 않으시잖습니까."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반박할 힘이 없었다. 아니, 사실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삼 년 동안 이렇게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보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나를 볼 때 계산을 했다. 이 여자를 이용할 수 있나, 이 여자를 밟아도 되나, 이 여자한테서 뭘 뜯어낼 수 있나. 그런데 이 남자의 눈에는 그런 게 없었다. 그냥 다친 사람을 걱정하는 눈이었다.
이상하게 그게 낯설어서 자꾸 눈을 피하고 싶어졌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그냥 다친 사람을 두고 갈 수는 없어서요."
"…네."
대답이 짧게 나왔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던 걸 그도 눈치챈 듯했다. 그가 잠깐 나를 살피더니 말투를 조금 낮췄다.
"걸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모르겠어요."
처음으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연기가 아니라. 그 사실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삼 년 동안 단 한 번도 '모르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다.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흔들리는 것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손목 하나 부러졌다고 그 방어벽이 이렇게 쉽게 갈라지는구나.
이서준이 조심스럽게 나를 부축하며 회랑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이 나를 배려해서 느려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보폭을 맞춰주는 그 세심함이, 오늘 겪은 다른 모든 일들과 대비되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회랑에 깔린 대리석 바닥이 발밑에서 차갑게 울렸다. 걸을 때마다 손목에서 뻐근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이서준의 팔이 든든하게 나를 받치고 있어서 다리가 꺾이지는 않았다. 몇 걸음쯤 걸었을까. 정원의 나무들 사이로 저녁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그 붉은 빛이 대리석 바닥 위에 길게 늘어졌다.
멀리서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등을 잡고 걸어오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화려하고, 걱정스러우면서도 어딘가 경계심이 섞인 목소리.
"서준아, 무슨 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