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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강도현은 응접실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흑갈색 머리카락이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빛을 받아 축축한 흙빛으로 가라앉아 보였고,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늘어선 하인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으며 차갑게 식어 있었다. 결혼식이 파탄 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저택의 공기는 아직도 그날 흩어진 화환의 냄새를 지우지 못한 듯 텁텁했고, 벽에 걸린 초상화들조차 침묵을 지키는 듯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창밖으로는 정원사가 부러진 아치 장식을 걷어내는 모습이 보였는데, 하얗던 리본 장식이 흙바닥에 끌려 갈색으로 얼룩진 채 버려져 있었다. 도현은 그 광경을 눈으로 좇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규칙적으로 갈랐다. "다시 묻겠다." 도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방 전체를 메우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날 밤, 소율의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인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으며 침묵을 지켰고, 그 정적이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응접실을 가득 채워 나갔다. 누군가는 옷자락을 만지작거렸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시선을 바닥의 무늬에 박아 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도현은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기다렸으나, 그 기다림에는 인내라기보다 억눌린 조급함이 배어 있었다. 소율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그의 턱은 단단하게 조여져 있었고, 이따금 이가 갈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삼키는 눈치였다. 창으로 스며든 빛이 그의 옆얼굴을 반쪽만 비추어, 밝은 쪽과 그늘진 쪽의 경계가 마치 그의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개의 감정처럼 뚜렷하게 갈라져 있었다. "저, 후작님." 나이 든 하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름은 정순이었고, 소율의 시중을 오래 들어온 여인이었다. 그녀는 손을 앞치마 자락에 문지르며 목소리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날 밤 늦게, 신부님께서... 소율 아가씨의 방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서하가." "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가씨의 비명이 들렸고, 저희가 달려갔을 때는 이미 발작이 시작된 뒤였습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다른 하인들은 시선을 피하며 바닥을 내려다보았지만, 그 침묵의 결이 곧 동의라는 것을 도현은 모르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그 동작만으로도 좌우에 선 이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뱀이 몸을 세우듯, 그의 움직임에는 느리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그 계집이." 그의 목소리에서 절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혼식 날 저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도, 소율에게까지 손을 댔단 말이지." 정순은 재빨리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본 것만 말씀드릴 뿐입니다, 후작님. 하지만... 신부님께서 평소에도 아가씨를 못마땅하게 여기셨다는 건 사용인들 사이에서도 알 만한 사실이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다른 하인들 사이에서도 낮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그중 젊은 하인 하나가 용기를 냈는지 조심스레 덧붙였다. "저도... 저녁 시중을 들다가, 신부님이 아가씨를 흘겨보시는 것을 두어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저 예민하신가 보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심상치 않은 눈빛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 반응들이 모여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순식간에 서하를 향한 반감으로 굳어져 갔다. 마치 눈덩이가 언덕을 굴러 내려가며 점점 커지듯, 처음엔 작은 의심이었던 것이 어느새 확신처럼 단단해지고 있었다. 누구도 그 흐름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저마다 기억 속 조각들을 끄집어내어 그 확신에 살을 붙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도현은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려다보았다. 정원의 나무들이 늦가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그 흔들림이 그의 속에서 들끓는 무언가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유리창을 짚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소율은 원래 몸이 약했다. 조금만 놀라도 발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그 방에 들어갔다는 건, 목적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그 문장은 응접실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하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반박하지 않았고, 그 무언의 동의가 도현의 확신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갔다. 그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는데, 거기 어린 표정은 분노보다는 오히려 서늘한 냉기에 가까웠다. 마치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그 결론을 뒷받침할 증거들을 하나씩 주워 모으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그의 속에서 짧게 스쳐 간 생각은 이내 다시 건조한 표정 아래로 가라앉았다. 도현은 유리창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이 정순을 지나 다른 하인들의 얼굴을 한 번 더 훑었는데, 그것은 마치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편인지를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그때 응접실 문이 조용히 열리며 집사장 박기준이 들어섰다. 그는 늘 그렇듯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로 도현에게 다가가 낮게 고했다. "후작님, 이서하 아가씨께서... 아직 방에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식사도 거의 손대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도현은 그 말을 듣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 한쪽이 씁쓸하게 비틀렸는데, 그것은 동정이 아니라 냉소에 가까웠다. "굶든 말든 알 바 아니다." 그는 짧게 내뱉었다. "그보다 소율의 상태가 먼저다. 의원은 다녀갔나." "예, 다녀갔습니다만... 아가씨께서 후작님을 뵙고 싶다고 계속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그 한마디에 도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방금 전까지 서하를 향해 서슬 퍼렇던 그 얼굴이, 소율의 이름 앞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풀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하인들 중 몇몇은 그 극명한 온도차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정순 역시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는데,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런 기색도 드러내지 않았다. "곧 가겠다고 전해라." 도현은 그렇게 말한 뒤 응접실을 나서려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정순을 향했다. "방금 한 말, 확실한 거겠지." "목숨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후작님." 도현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의심이라기보다는, 이미 믿기로 한 것을 재차 확인하려는 조바심이 섞여 있었다. 그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응접실 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남기고 간 정적 속에서 하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고, 그 눈빛들 안에는 하나같이 같은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신부는 죄인이었다. 저택 어디에도 그녀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박기준은 도현이 사라진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정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목소리만은 낮게 갈라져 나왔다. "자네가 본 것이 정말 그것뿐인가." 정순은 순간 그의 시선을 피하며 앞치마 자락을 다시 매만졌다. "제가 무슨 다른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후작님께서 원하시는 답을... 저는 그저 드린 것뿐입니다." 박기준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다만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것이 동조인지 경계인지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으나, 그의 침묵이 응접실 안에 감돌던 확신 위로 옅은 균열을 남기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하인들은 그 균열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저마다 흩어져 각자의 일로 돌아갔고, 응접실은 다시 텅 빈 채 오후의 빛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편 그 시각, 저택의 가장 깊은 별채에서는 문이 굳게 닫힌 방 안으로 아무런 빛도 들지 않고 있었다. 그 방의 주인이 그 안에서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는, 저택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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