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무도회 당일, 서하의 방에는 사흘 전과는 전혀 다른 활기가 감돌고 있었다.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마저 그날과는 다른 온도로 느껴졌는데, 사흘 전 그 방을 채웠던 것이 죽음 같은 정적과 절망이었다면, 지금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이 공기를 메우고 있었다.
준혁이 은밀히 불러들인 재봉사가 자단목 틀 앞에서 옷감을 펼쳐 놓았는데, 그 색이 짙은 청록빛이었다. 옷감이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아 어두운 물속처럼 일렁이며 빛깔을 달리했다. 서하가 늘 즐겨 입던 아마빛이나 상아빛과는 달리, 그 강렬한 색은 마치 그녀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였다.
"이 색은 너무 대담하지 않나요." 재봉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손끝으로 옷감을 매만지는 그녀의 표정에는 은근한 걱정과 함께, 이 파격이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지켜보고 싶은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저택 안에서 도는 이야기들을 아신다면, 신부님께서는 차라리 몸을 낮추고 조용한 색을 택하시는 편이…"
"이번만큼은 숨지 않을 거예요." 서하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재봉사의 손에서 옷감을 받아 들며 그녀는 그 짙은 청록빛을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는데, 그 감촉이 차가운 물처럼 서늘했다.
머리카락은 위로 틀어 올려 목덜미를 드러냈고, 그 위에 이한가에서 대대로 물려온 사파이어 목걸이가 얹혔다. 하녀가 목걸이의 걸쇠를 잠글 때, 서하는 그 차가운 감촉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오래전 어머니의 목에 걸려 있던 물건이었으나, 지금은 오직 그녀 자신의 것으로 다시 태어난 듯했다.
서하는 화장이 끝난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바라보았는데, 사흘 전 그 초라한 여인의 흔적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눈두덩에 스민 옅은 그림자는 오히려 눈매를 더 깊고 강렬하게 만들었고, 입술에 칠해진 짙은 색은 그녀의 창백한 피부와 대비되어 결연함을 더했다. 대신 그 자리에는 턱을 살짝 치켜든, 도전적인 눈빛의 여인이 서 있었다.
*병약함으로 동정을 구걸할 수 없다면, 나는 강함으로 증명하겠다.*
그 생각이 그녀의 등을 곧게 세웠다. 어깨를 펴는 그 순간마다 옷깃 아래 갈비뼈가 뻐근하게 저려왔지만, 서하는 그 통증조차 악물듯이 삼켰다. 준혁이 방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서하가 걸어 나오자 그의 짙은 남색 눈동자에 짧은 놀라움이 스쳤다. 그 놀라움은 곧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뀌었고, 마지막에는 옅은 만족의 기색이 남았다.
"준비가 다 됐군." 준혁이 팔을 내밀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낮고 건조했으나, 그 안에는 미묘한 긴장이 배어 있었다. "저택 사람들의 시선은 각오해 둬. 오늘 이후로는 되돌릴 방법이 없을 테니."
"이미 각오했어요." 서하가 그의 팔에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떨림을 애써 감추며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창밖으로 마차들이 줄지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그 바퀴 소리마다 서하의 심장은 한 박자씩 빠르게 뛰었다.
무도회장의 문이 열리자 황금빛 샹들리에의 빛이 쏟아져 내렸고, 그 아래 모인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수백 개의 촛불이 만들어낸 빛이 대리석 바닥 위에서 부서지듯 흔들렸고, 그 위로 드리워진 정적은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방 전체를 가득 메웠다. 서하가 청록빛 드레스를 입고 준혁의 팔에 기대어 등장하자, 시선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쏟아졌는데 그 시선들 속에는 호기심과 경멸이 뒤섞여 있었다.
"저 여자가..." 누군가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소율 아가씨를 해쳤다는 그 신부잖아."
"저런 색을 입고 나타날 줄이야." 다른 누군가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소곤거렸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모양이지."
그 말이 파문처럼 번져 나가자 무도회장 곳곳에서 손가락질 섞인 시선들이 이어졌다. 서하는 그 시선들을 하나하나 정면으로 받아내며 걸음을 늦추지 않았고, 그 당당함이 오히려 사람들을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죄인이라면 저렇게 고개를 들 수 없을 텐데, 하는 의문이 그들의 얼굴에 스치는 것을 서하는 놓치지 않았다. 몇몇의 시선은 그녀의 목에 걸린 사파이어를 향했다가, 이내 불편한 듯 거두어졌다.
"저 뻔뻔함 좀 보게." 누군가 비웃듯 중얼거렸지만, 서하는 그 말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은 자신감이라기보다 벼랑 끝에서 짜낸 마지막 힘이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큼은 완벽하게 꾸며져 있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뛰는 것 같았으나, 서하는 그 박동을 억누르며 준혁의 팔을 조금 더 세게 붙잡았다.
"도현 후작은 아직 안 보이는군." 준혁이 낮게 속삭였다. 그의 시선이 무도회장 저편을 훑으며 지나갔다. "소율의 방을 지키고 있겠지."
서하는 그 말에 잠시 가슴이 저릿해졌지만, 이내 표정을 가라앉히고 무도회장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뱀이 미끄러지듯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등 뒤로 쏟아지는 시선들이 마치 수백 개의 바늘처럼 피부를 찔러왔지만, 서하는 그 통증마저 무시한 채 앞만 보고 걸었다.
악단의 선율이 흐르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시선은 조금씩 흩어졌지만, 여전히 서하를 향한 은밀한 관찰은 계속되고 있었다. 부채 뒤에서 소곤거리는 입술들과, 술잔을 든 채 곁눈질로 그녀를 살피는 눈동자들이 무도회장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 시선들 한가운데서 술잔을 받아 들며 애써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잔 속의 붉은 포도주가 흔들리며 촛불의 빛을 담아냈는데, 그 빛깔이 마치 핏빛처럼 번쩍였다.
"긴장하지 마." 준혁이 그녀의 곁에서 작게 말했다. "여기서 흔들리는 순간, 저들은 그것을 죄의 증거로 삼을 거야."
"알아요." 서하가 낮게 대답하며 잔을 입에 가져갔다. 포도주의 씁쓸한 향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동안에도, 그녀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무도회장 전체를 훑고 있었다.
그때, 무도회장 입구에서 또 한 번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지안 아가씨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 이름이 들리자 준혁의 표정이 처음으로 눈에 띄게 밝아졌다. 서하 역시 그 소식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는데, 늦게 도착한 지안이 이 자리에서 얼마나 큰 힘이 될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이 무도회장의 공기가 조금은 달라질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무도회장 저편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그 발소리는 무겁고 규칙적이었으며, 마치 예고 없이 다가오는 폭풍처럼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급격히 다른 빛깔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호기심과 경멸로 뒤섞였던 눈빛들이 이제는 어떤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몇몇은 숨을 죽인 채 그 발소리가 향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하는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예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