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간식을 먹으러 나가기 전, 소라는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름을 돌아보았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이 소라의 옆얼굴에 옅게 걸쳐 있었고, 그 빛을 등지고 선 소라의 표정에는 평소의 장난기 대신 낯선 진지함이 얹혀 있어서, 아름은 순간적으로 숨을 죽이며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 질문, 대답 안 해줘도 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 소라가 애써 가볍게 말했지만, 그 눈빛에는 여전히 답을 기다리는 기색이 남아 있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소라의 머리카락 끝을 흔들었고, 그 사소한 움직임조차 아름의 시선을 붙잡아 두는 것 같아서, 아름은 애써 시선을 내리며 손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매만졌다.
아름은 그 눈빛을 마주하며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목 안쪽 어딘가에서 말이 걸린 듯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대답을 하면, 그다음엔 정말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소라는 이미 문을 열고 있었고, 아름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
다음 주 월요일, 청람고등학교 점심시간.
급식실 안은 밥과 국의 냄새가 뒤섞인 채 후끈한 공기로 가득했고, 식판을 든 학생들의 발소리와 웃음소리가 낮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급식실에서 나란히 앉아 밥을 먹던 두 사람 사이로, 반 친구 중 한 명인 지윤이 불쑥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너네 요즘 되게 붙어 다니더라. 무슨 일 있어?" 지윤의 물음에 아름은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숟가락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고, 국물 한 방울이 식판 위로 툭 떨어지는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냥, 옛날부터 알던 사이니까." 아름이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목소리 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지윤은 별생각 없이 옆자리에서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아름의 대답을 흘려듣는 듯했지만, 그 무심함이 오히려 아름의 심장을 더 조여왔다.
"그치, 우리 어릴 때부터 절친이었거든." 소라가 자연스럽게 말을 받으며 웃었는데, 그 능숙한 태도에 아름은 오히려 더 긴장이 되었다.
소라의 웃음은 흔들림 없이 매끄러웠고, 그 여유로운 표정 뒤에 어떤 감정이 숨어 있는지 아름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어서, 식판 위의 반찬을 괜히 뒤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지윤이 별다른 의심 없이 다시 자기 얘기를 하며 자리를 옮기자, 아름은 겨우 마음을 놓으며 소라를 향해 낮게 속삭였다.
"진짜 조심해야겠다." 아름의 걱정 어린 말에, 소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괜찮아,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소라의 자신감 어린 미소에, 아름은 왠지 모를 불안이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음을 느꼈다.
급식실을 나서며 소라는 식판을 반납대에 올려놓고는, 뒤따라오는 아름을 향해 슬쩍 눈짓을 보냈고, 그 눈짓 하나에 담긴 여유로움이 아름에게는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아름은 소라의 옆에서 조용히 걸음을 맞췄다.
***
오후 수업이 끝나고 하교하는 길, 두 사람은 늘 그렇듯 조금 떨어져서 걷다가 인적이 드문 골목에 이르러서야 어깨를 나란히 붙였다.
교문을 나서기 전까지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각자의 속도로 걸었지만, 큰길을 벗어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는 순간 둘 사이의 거리가 자연스럽게 좁아졌고, 그 짧은 순간의 변화가 아름에게는 늘 낯설면서도 익숙한 안도감을 주었다.
"오늘도 힘들었지." 소라가 아름의 손을 살짝 잡으며 말했는데, 그 손의 온도가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낮 동안 서늘하게 식어 있던 아름의 손끝이 소라의 손 안에서 천천히 데워지는 것 같았고, 그 온기가 손을 타고 팔을 지나 가슴께까지 번져오는 것을 느끼며 아름은 잠시 걸음을 늦췄다.
"들키지 않으려고 신경 쓰는 게 생각보다 진 빠지는 일이더라." 아름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소라는 걸음을 멈추고 아름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가로등이 아직 켜지지 않은 시간이라 골목은 옅은 주황빛 저녁볕으로만 물들어 있었고, 그 빛 속에서 소라의 눈동자가 유난히 짙게 가라앉아 보였다.
"그럼 이제부터 더 조심할게. 대신—" 소라가 말을 끌며 슬쩍 아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만히 갖다 대었다.
"이런 것쯤은 봐줘." 소라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아름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얼른 손으로 소라를 밀어냈다.
"동네 사람 다 보잖아." 아름이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지만, 골목에는 인적이 없었고, 담벼락에 붙은 낡은 전단지만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픽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소리가 좁은 골목 벽 사이에서 잠깐 울리다 이내 조용히 잦아들었다.
웃음이 잦아든 뒤, 소라는 문득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를 확인하다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화면 속 무언가를 응시하는 소라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고,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은 아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그래?" 아름이 묻자, 소라는 애써 웃으며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아니, 별거 아니야." 소라가 대답했지만, 그 목소리에 미묘하게 흔들리는 기색이 남아 있어서, 아름은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을 느끼며 소라의 얼굴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주머니에 넣은 손이 잠시 그 안에서 머뭇거리듯 멈춰 있었고, 소라답지 않게 걸음을 옮기는 속도가 평소보다 조금 빨라졌다는 것을, 아름은 놓치지 않고 느꼈다.
'분명, 별거 아닌 표정이 아니었는데.'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소라가 다시 아름의 손을 잡아끌며 걸음을 옮기는 바람에, 그 순간의 불안은 말없이 두 사람 사이의 골목길 속으로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저녁볕 속에서 길게 늘어졌고, 그 그림자의 끝이 서로 겹쳐지는 것을 아름은 문득 내려다보며, 소라의 손을 조금 더 세게 붙잡았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한 번 들려왔다가 이내 조용해졌고,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 위로 저녁의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