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명의 만렙 검신

2화

붉은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노려보는 건지, 관찰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검을 든 손을 슬쩍 뒤로 물렸다. '싸우면 죽는다.' 영혼은 이 세계 어떤 놈보다 강할지 몰라도, 지금 이 몸으로는 검을 세 번 휘두르기 전에 팔이 빠질 것 같았다. '전생에는 이런 놈 열 마리도 한 손으로 정리했는데.' 지금은 그 한 손이 여섯 살배기 손이라는 게 문제였다. 손가락도 짧고, 손목도 얇고, 무엇보다 검을 쥐는 악력 자체가 나오지 않았다. '인생 참 공평하지가 않네.' 그르릉-. 낮은 울음소리가 났다. 짐승이 천천히 다가왔다. 덩치는 개보다 조금 크고, 등에는 뾰족한 뿔이 두 개 솟아 있었다. 딱 봐도 순한 얼굴은 아니었다. 가죽은 진흙색과 잿빛이 섞여 있었고, 발톱 끝은 이미 뭔가를 찢어본 자국처럼 닳아 있었다. '저거, 사람도 먹어봤다는 소리네.' '도망쳐야 한다.' 나는 몸을 돌렸다. 다리가 짧았다. 뛰어봐야 몇 걸음이었다. 어른이었으면 세 걸음에 낼 거리가 지금은 여섯 걸음이었다. 비율만 따지면 딱 두 배 손해였다. '이래서 애들이 도망을 못 치는구나.' 뒤에서 짐승이 튀어 올랐다. 콰직! 나는 그대로 나무 밑동을 붙잡고 옆으로 굴렀다. 다행히 몸이 작아서 좋은 점 하나는 있었다. 작으니까 빨리 구를 수 있었다. 짐승의 뿔이 나무를 스쳤다. 나무껍질이 종잇장처럼 뜯겨 나갔다. '저게 내 옆구리였으면 지금 이 세계는 조연 하나 잃고 시작했겠지.' '몸은 안 되지만, 감각은 그대로다.' 영혼의 격이 여전히 살아 있다면, 반응 속도와 판단력은 어른 시절과 똑같아야 했다. 실제로 그랬다. 짐승의 다음 움직임이 눈앞에 그려지듯 보였다. 문제는 그 그림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머리는 프로인데 몸은 신입이다. 이거 완전 사수 없는 신입사원이네.'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내질렀다. 어른의 몸이었다면 단칼에 정리했을 궤적이었다. 지금은 어설프게 흔들리는 나뭇가지 같았다. 그래도 방향은 맞았다. 짐승의 앞다리에 얕은 상처가 났다. 캬악! 짐승이 뒷걸음질 쳤다. 놈이 나를 다시 노려보는 사이, 나는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는 못 이긴다. 그렇다고 도망도 못 친다.' 계단식으로 답이 없었다. 숨은 턱까지 차 있었고, 팔은 벌써 후들거렸다. '이 짐승 하나 못 잡으면 나는 여기서 그냥... 짐승 밥이구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 순간 떠오른 게 있었다. 선협(仙俠). 원래 세계에서 반쯤 취미로 정리해두던 호흡 이론이었다. 기를 몸 안에 순환시켜 잠깐씩 폭발적인 힘을 끌어내는 방식. 어른 몸에선 그리 대단한 효율이 아니었다. 사실 옛날엔 그냥 '재미로 짜본 이론' 취급이었다. 논문도 아니고 그냥 취미 노트에 낙서처럼 적어둔 거였다. '그게 지금 목숨을 구할 줄 누가 알았겠냐.'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없으면 죽는다. 나는 눈을 감았다. 0.3초. 그 안에 호흡 순서를 재배열했다. 어른의 경락과 여섯 살 아이의 경락은 굵기 자체가 달랐다. 그대로 밀어넣으면 혈관이 터질 판이었다. '좁은 통로에는 좁은 물살로.' 순환의 압력을 낮추고, 그 대신 순환 속도를 세 배로 올렸다. 호스로 소방차 물을 뿜으면 호스가 터지니까, 압력을 줄이고 대신 빨리 흘려보내는 식이었다. '이런 비유 하나만 봐도 내가 얼마나 급하게 짰는지 알겠지.' [선협 재구성 완료 - 임시 명칭 : 유아형 순환진] [경고: 지속 시간 극히 짧음 / 과사용 시 경락 손상] 좋아, 됐다. 짧고, 위험하고, 딱 한 번만 쓸 수 있는 카드였다. '무슨 게임에서 쓰는 일회용 스크롤 같은 거네.' 하지만 지금은 그거로 충분했다. 나는 다리에 힘을 줬다. 순환진이 돌아가는 순간, 몸이 가벼워졌다.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뭔가 뜨거운 것이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짐승이 다시 뛰어드는 것과 동시에, 나는 그보다 반 박자 빠르게 검을 그었다. 서걱. 짐승의 목이 옆으로 기울었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이 쓰러졌다. 순환진의 여파로 팔이 저릿저릿했다. 손끝까지 마비된 것처럼 감각이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겼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나는 짐승의 사체를 바라봤다. '이 정도 놈한테도 이 고생을 하다니.' 전생에는 워밍업 상대도 안 됐을 놈인데. 앞으로 얼마나 더 강한 놈들을 만날지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이 세계, 난이도 설정을 아무래도 하드코어로 해놨나 보다.' 그날 밤, 나는 동굴을 찾아 들어가 웅크렸다. 배가 고팠다. 무섭기도 했다. 바람 소리조차 짐승 울음처럼 들려서 몇 번이나 검자루를 다시 쥐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떠오른 건 하나였다. '이 몸으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성인의 몸을 되찾아야 한다.' 방법은 몰랐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지금 이 순환진을 조금씩 다듬으면, 언젠가 경락도 함께 자라리라는 것. 몸이 자라는 속도에 맞춰 무공을 재설계하면 된다. 계단을 하나씩 오르듯이. '조급하게 뛰어봐야 넘어지는 건 나 하나뿐이지.'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십 년. 그 안에 이 여섯 살짜리 몸을 완전한 성인의 몸으로 되돌리기로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은둔이었다. 낮에는 사냥하고, 밤에는 순환진을 고쳤다. 처음 몇 달은 토끼만 한 짐승도 겨우 잡았다. 반년이 지나자 손목에 힘이 조금 붙었다. 그리고 그 사냥감으로 겨우 하루를 버텼다. 소금 하나 구하는 것도 전쟁이었고, 불씨 하나 지키는 것도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한 살, 두 살, 몸이 자랄 때마다 경락의 굵기가 달라졌고, 나는 그때마다 선협을 다시 짰다. [유아형 순환진 Ver.2] [유아형 순환진 Ver.3 - 압력 재조정] 버전이 늘어날수록 노트도 두꺼워졌다. '이러다 나중엔 무슨 소프트웨어 패치노트 쓰는 기분이겠네.' 세 번째 겨울에는 늑대 형태의 마수 세 마리와 동시에 마주친 적도 있었다. 그날은 순환진을 두 번이나 연속으로 돌렸다. 팔이 이틀 동안 남의 팔처럼 굳어 있었다. '그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살았으니 됐다, 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섯 번째 겨울이 지날 무렵, 나는 이미 순환진 없이도 웬만한 짐승 정도는 정리할 수 있었다. 검을 쥐는 손도 그때쯤엔 제법 어른 흉내를 낼 만큼 굵어져 있었다. 그 무렵부터는 사냥보다 수련 시간이 더 길어졌다. 낮에는 근력을 키우고, 밤에는 경락을 다듬는 나날이 반복됐다. 아홉 번째 해, 나는 폭포 근처의 넓은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물살이 세고, 마수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위험 지역이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아무도 오지 않는 땅이었다. '누가 이런 데를 일부러 찾아오겠어.' 덕분에 방해받지 않고 수련할 수 있었다. 폭포 소리가 밤낮으로 시끄러웠지만, 그 소리에 맞춰 순환진의 박자를 재는 것도 나름 익숙해졌다. 그리고 십 년째 되는 해, 겨울이 끝나갈 즈음이었다. 나는 계곡 한가운데 서서 검을 내려다봤다. 검날에는 흠집이 여러 개 나 있었다. 매번 새로 갈아도 다시 생기는 흠집이었다. [신체 정보] 연령: 15세 (추정) '열다섯.' 아직 성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근골이 어른의 형태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순환진의 압력도 이제는 성인급 경락을 견딜 수준까지 올라와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진짜 예전 몸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조금만 더. 그렇게 생각한 순간, 계곡 저편에서 땅이 울렸다. 쿠구구구. 한둘이 아니었다. 발소리가 겹쳐서 마치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들렸다. 수십, 아니 수백 마리의 마수 무리가 계곡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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