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쿠구구구.
땅이 계속 울렸다.
나는 폭포 옆 바위 위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계곡 입구를 가득 메운 검은 물체들.
하나같이 눈이 붉었고, 등에는 뾰족한 뿔이 나 있었다.
'저것들, 십 년 전 그 짐승들이잖아.'
다만 그때보다 열 배는 많았다.
숫자를 세다가 그만뒀다.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였다.
십 년 전엔 저놈들 한 마리한테 쫄아서 나무 뒤에 숨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그저 '아, 또 왔네' 정도의 감상밖에 안 들었다.
이러니 사람은 확실히 자라긴 하는구나.
[경고: 마수 집단 이동 감지 - 군락 단위]
'단체로 이동하는 이유가 뭐지.'
답은 오래 생각할 필요 없었다.
계곡 뒤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을 가렸다.
쿠오오오오-!
포효였다.
그 소리 하나에 근처 나무들의 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바위 위에 서 있던 내 몸까지 살짝 흔들릴 정도였다.
'저게 포효야, 지진이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배경으로 은빛 비늘의 거체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날개 하나 폭이 계곡 너비만 했다.
'저건... 용이잖아.'
십 년을 살면서 이 세계에 용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교과서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걸 실물로 마주친 기분, 이라고 하면 적절할까.
용은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그 아래의 마수 무리가 계곡을 향해 밀려들었다.
나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용이 자기 영역을 침범한 마수 떼를 몰아내는 중이었다.
하필 그 방향이 내가 십 년째 수련하던 계곡이었다.
'재수 없게 이런 데로 도망치나.'
십 년 동안 순환진 돌리고, 검로 다듬고, 밥 먹듯 죽을 뻔했던 이 계곡이 갑자기 마수 청소장이 된 셈이었다.
억울하긴 한데, 뭐 어쩌겠나.
나는 검을 뽑았다.
청광이 흘렀다.
성기급이라지만, 열 살 넘는 시간 동안 매일 다듬은 검로는 검의 등급 이상으로 매서웠다.
칼날에 서린 빛을 보면서 잠깐 생각했다.
'이거 십 년째 매일 휘두르는데도 안 질리네.'
질렸으면 이미 도망쳤겠지.
선두의 마수가 나를 향해 뛰었다.
눈이 붉게 빛나면서 아가리를 벌렸다.
서걱.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순환진 없이도 이 정도는 이제 가벼웠다.
숨소리도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전투 기록 갱신 - 단독 처치 3연속]
'갱신이라니, 이거 어디 게임 랭킹판이냐.'
시스템 이 자식은 꼭 이런 순간에 통보를 날린다.
전투 중에 팝업 뜨는 게임이 있었으면 아마 유저 컴플레인으로 서버 터졌을 텐데.
하지만 마수는 끝없이 밀려들었다.
뒤에서, 옆에서, 위에서.
계곡 전체가 검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하나씩 상대해서는 끝이 안 보였다.
나는 자세를 낮추고 순환진을 돌렸다.
압력이 밀도 있게 차올랐다.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게 치고 올라오는 감각.
십 년 전 여섯 살 몸으로 겨우 한 번 썼던 그 카드가, 지금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쓸 수 있는 수준으로 자라 있었다.
그때는 한 번 쓰고 사흘을 앓아누웠는데.
지금은 이 정도로는 숨도 안 가쁘다.
'많이 컸다, 진짜.'
촤아아악!
검이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한 번의 궤적에 다섯 마리가 동시에 갈라졌다.
[신기록: 1회 검격 다수 처치 - 5]
'또 갱신.'
으쓱해지는 것도 잠시, 마수 무리는 여전히 절반도 줄지 않았다.
수를 봐서는 아직도 백 마리 가까이 남은 것 같았다.
이쯤에서 슬슬 팔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끝이 있긴 한 거냐.'
그때였다.
하늘의 용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곧게 나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몸체가 커지는 걸 눈으로 확인하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거 설마 마수랑 나를 같이 정리하려는 거 아냐.'
십 년 수련해서 이제야 좀 사람 구실 하게 됐는데, 여기서 용한테 밟혀 죽으면 그것도 참 볼썽사나운 결말이지.
쿠와아앙!
용이 계곡 바닥에 내려서며 지면이 흔들렸다.
먼지가 확 피어올랐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비늘은 은빛으로 반짝였고,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운 청색이었다.
크기는 웬만한 건물보다 컸다.
덕분에 나는 순간 내가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땅 위에 선 채로 고개를 있는 대로 꺾어야 겨우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거긴 내 영역이다, 인간." 용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굵었다.
배 속까지 울리는 저음이었다.
말을 할 수 있는 용이었다.
'말하는 용이라니, 이거 완전 판타지 소설 정석 아냐.'
어릴 때 읽던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실제로 눈앞에서 듣고 있으니 묘하게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물론 웃을 상황은 아니었다.
"미리 말씀 좀 해주시지, 여기 십 년째 살고 있었는데요." 나는 대꾸했다.
용의 눈썹, 정확히는 눈두덩이 꿈틀했다.
"이 계곡이 내 영역이라는 걸 몰랐다는 건가." 용이 물었다.
"알 리가 없죠. 팻말도 없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싸울 거면 그냥 싸우자고 해라, 말이 왜 이렇게 길어.'
십 년을 혼자 살면서 대화 상대가 없어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자꾸 말이 길어지는 버릇이 생겼다.
용은 잠시 나를 훑어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마치 물건 감정하듯이.
"인간의 아이가 이 정도 마수 떼를 상대하고 있다는 게 흥미롭군." 용이 말했다.
'애? 몸이 애처럼 보이나?'
나는 그제야 내 몰골을 자각했다.
십 년을 자랐어도 아직 완전한 성인 체형은 아니었다.
외모로는 열다섯 소년 정도로 보일 게 뻔했다.
키도 그렇고, 몸통 두께도 아직 다 자란 성인 남자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속은 스물여섯인데 겉은 열다섯이라니, 이거 완전 사기 캐릭터 설정 아니냐.'
억울했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흥미로우면 도와주시던가요."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용이 픽 웃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콧방귀 같기도 한 소리였다.
콧구멍에서 옅은 연기 비슷한 게 새어 나왔다.
"도움은 필요 없어 보이는데." 용이 답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건 없잖아.'
그 순간, 마수 떼가 다시 밀려들었다.
숨 쉴 틈도 안 주는 놈들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검을 세웠다.
용도 더는 말을 섞지 않았다.
대신 앞발을 들어 마수 무리를 향해 내리찍었다.
쾅!
지면이 그대로 뒤집혔다.
마수 수십 마리가 한 번에 사라졌다.
흙먼지와 함께 잔해 몇 조각이 튀어 올랐다가 툭툭 떨어졌다.
'저거 반칙 아니냐.'
나는 십 년 동안 검 하나로 씨름했는데, 저쪽은 발 한 번 찍는 걸로 저 짓을 한다.
세상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래도 지금은 불공평함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도 검을 휘둘렀다.
용과 나, 각자 반대편에서 마수 무리를 밀어붙였다.
한쪽은 발톱과 앞발로, 한쪽은 검으로.
묘하게 합이 맞는 느낌도 들었다.
'이거 뭐야, 협동 플레이 같은데.'
한동안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고 나니, 계곡은 조용해졌다.
마수는 전부 정리됐다.
계곡 바닥엔 흙먼지와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검을 짚고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용은 여전히 멀찍이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소리도 크게 흐트러지지 않은 걸 보니, 저쪽은 저 정도로는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이름이 뭐지?" 용이 물었다.
'이름부터 물어보는 거 보니 완전 적대 관계는 아닌가 본데.'
싸움 끝나고 이름 묻는 상대라면 최소한 자기 밥그릇 뺏길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진랑." 나는 짧게 답했다.
"나는 설린." 용이 답했다.
'설린.'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었다.
발음을 몇 번 속으로 되뇌어봤다.
'설린, 설린...'
기억을 더듬어봤다.
십 년 전, 여섯 살 몸으로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이 계곡 어딘가에서 먼발치로 은빛 짐승 하나를 스쳐 본 기억이 있었다.
그때는 무서워서 도망쳤을 뿐이었다.
작았던 몸으로 정신없이 뛰어 도망치다가, 뒤돌아본 순간 얼핏 보였던 은빛 그림자.
그게 지금 눈앞의 이 거대한 존재였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리, 전에 만난 적 있나?" 나는 물었다.
설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거대한 머리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지는 모습이, 크기만 빼면 어딘가 사람 같은 몸짓이었다.
그 순간, 계곡 바깥에서 또 다른 기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발소리였다.
땅을 밟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분명 사람의 걸음걸이였다.
사람이었다.
이 계곡 근처엔 십 년 동안 사람이 온 적이 없었는데.
나는 검을 든 채로 시선을 계곡 입구 쪽으로 돌렸다.
설린도 그 기척을 느낀 듯,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방금까지 마수 떼가 밀려들던 자리에, 이번엔 대체 뭐가 걸어오고 있는 건지.
'설마 저것도 한바탕 해야 하는 상대는 아니겠지.'
십 년 만에 사람 발소리를 듣는다는 게 반가워야 할 일인데, 지금은 그 반가움보다 경계심이 먼저 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