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선배 때문에, 자꾸 웃잖아요

5화

행사가 끝난 다음 주, 평범한 화요일 밤이었다. 매장은 한산했다. 형광등 불빛만이 조용히 매장 안을 채우고 있었다. 서아가 카운터에서 태블릿으로 뭔가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도윤은 진열대 앞에서 캔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 줄, 한 줄, 맞춰가며. 평소 같으면 이런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자꾸 서아 쪽으로 시선이 갔다. '뭘 보고 있는 거지.' 궁금함이 손끝까지 스며들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뭐 봐요?" 스스로도 놀랐다. 먼저 말을 건 건 처음이었다. 목소리가 나간 순간, 뒤늦게 심장이 쿵 뛰었다. 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고 도윤을 바라보았다. "어, 먼저 물어보네." "……그냥요." 도윤이 캔을 정리하던 손을 슬쩍 멈췄다. 괜히 물었나 싶었다. 서아가 화면을 돌려 보여주었다. 축구 하이라이트 영상이었다. 선수들이 공을 몰고 달리는 장면, 슛이 골대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도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숨이 짧게 끊겼다. "저번에 물었을 때 대답 안 했잖아. 축구 했었냐고." 서아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하지만 도윤의 귀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도윤은 진열대의 캔을 정리하던 손을 완전히 멈췄다. "안 했어요." "진짜?" "네." 짧은 대답들이 튕겨 나왔다. 너무 빨리, 너무 단호하게. 서아는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잠시 도윤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의심과 걱정 사이에서 흔들렸다. "이상하네. 캔 떨어졌을 때 반사적으로 몸 움직이는 거 보고, 딱 그런 느낌이었는데." "어떤 느낌이요." "운동선수 느낌." 도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진열대의 캔을 하나씩 다시 정렬했다. 이미 정렬된 캔을 또 만지고, 또 만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모를 리가 없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서아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겁먹은 토끼처럼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여기 이대로 있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둘 다 이상했다. 밤 아홉 시가 넘어가자 다시 손님이 몰렸다. 계산대 앞에 줄이 생겼다. 학생들, 퇴근길 직장인들, 편의점 도시락을 든 사람들. 도윤은 기계적으로 바코드를 찍었다. 삑, 삑, 삑.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정신을 다른 데 두는 데는 도움이 됐다. 그때 한 아이가 부모님과 함께 들어왔다. 아이의 손에는 축구공 모양 열쇠고리가 달린 가방이 들려 있었다. 아이는 매장 안을 두리번거리다 잡지 진열대 앞에서 멈춰 섰다. "아빠, 나 이거 사줘요." 아이가 축구 관련 잡지를 가리켰다. 표지에 유명 선수의 사진이 크게 실려 있었다.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선수의 모습, 환하게 웃는 얼굴. 도윤의 시선이 잠깐 그 잡지에 머물렀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숨이 얕아졌다. 그 순간, 낡은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운동장의 흙냄새, 관중석의 소음, 발끝에 닿는 공의 감촉. 전부 오래전에 묻어버렸다고 생각한 것들이었다. "손님, 봉투 필요하세요?" 간신히 물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갈라졌다. 손이 계산대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아이의 부모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계산을 마치고, 잡지를 봉투에 넣어 나갔다. 손님이 나가고 난 후, 도윤은 잠시 멈춰 섰다. 계산대 위에 손을 짚고 숨을 골랐다. 가슴이 답답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도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서아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없이. 카운터 반대편에서, 진열대를 정리하는 척하며 도윤을 살피고 있었다. 표정에는 걱정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다. 마감 시간이 다가올 무렵, 매장에 손님이 끊겼다. 서아가 청소를 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빗자루로 바닥을 쓸다 말고, 도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윤아." "네." "불편하면 말 안 해도 돼. 근데 나 예전에 알던 애랑 너, 좀 닮은 것 같아서." 도윤의 손이 멈췄다. 진열대를 정리하던 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누구요." "고등학교 이 학년 때, 도서관에서 자주 마주치던 애가 있었어." 서아가 말을 이었다. 눈빛이 먼 곳을 향해 있었다. 회상에 잠긴 얼굴이었다. "항상 혼자 앉아서 책만 읽고, 말도 잘 안 하고. 근데 축구를 되게 잘했어. 학교 대표였거든." 도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숨이 턱 막혔다. '설마.' "경기하는 거 몇 번 봤는데, 진짜 잘하더라. 코치 선생님이 그 애 얘기 자주 했어. 프로 가겠다고, 다들 그랬어." 서아가 잠깐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애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안 보이더라고. 소문만 무성했어. 뭘 잘못했다는 둥, 사고를 쳤다는 둥." 서아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바닥을 쓸던 빗자루가 멈췄다. "나는 그때 아무것도 몰랐어. 그냥 걔가 걱정됐는데, 도와주지 못했어." 도윤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과거의 잔상들이 눈앞에서 흐릿하게 겹쳐졌다. '그만해.' 속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서아가 도윤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조심스러웠다. 빗자루를 든 손이 살짝 떨렸다. "너, 혹시 그때…… 아니, 아니야." 서아가 스스로 말을 끊었다.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피했다. "미안, 이상한 소리 했다." "……아니에요." 도윤이 겨우 대답했다.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목구멍이 타는 듯 뜨거웠다. 서아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도윤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확신에 가까운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 눈빛이 오래 도윤의 뒤통수에 남았다. 마감을 마치고 도윤이 유니폼을 벗을 때, 서아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탈의실 문 앞에서,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도윤아, 나 궁금한 거 있어도 안 물을게. 근데 하나만 알아줬으면 좋겠어." "뭘요." "나는 안 도망가."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서아의 얼굴에는 여느 때와 같은 밝은 웃음이 없었다. 대신 진지한 눈빛만 있었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도윤은 그 눈빛을 오래 마주 보았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가슴이 이상하게 조여왔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입을 열려다가, 결국 다시 닫았다. 서아도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그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매장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온 도윤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람이 뺨을 스쳤다. 차가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윤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엄마였다. "도윤아, 하은이 좀 늦게 오는데 데리러 가줄 수 있어?" "……왜요."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대. 자세히는 얘기 안 하는데, 목소리가 안 좋아." 도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전화를 끊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또.' 숨이 가빠졌다. 가로등 불빛이 스쳐 지나갔다. 학교까지 가는 길이 평소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다.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때, 하은은 교문 옆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가방은 옆자리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은아." 도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가갔다. 목소리에 걱정이 그대로 묻어났다. 하은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게 부어 있었다. 뺨에는 눈물이 마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도윤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다시 한번 쿵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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