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공략집 다 외웠는데 혐오라니

1화

이도훈은 교실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원래 그런 자리였다. 창가도 아니고, 앞자리도 아니고, 그냥 구석. 시선이 닿지 않는 자리. 담임이 종이 뭉치를 나눠주며 지나갔다. 앞줄부터 차례로 손에 쥐여주며 걸었다. 도훈의 자리엔 던지듯 놓고 갔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었다. 종이가 책상 끝에서 반쯤 걸려 떨어질 듯 말 듯 흔들렸다. 도훈은 손끝으로 밀어 넣었다. 별거 아니었다. 쉬는 시간, 반장 무리가 그의 책상 옆을 지나갔다. 발소리가 셋, 넷. 웃음소리가 먼저였다. "저 새끼 아직도 혼자냐." 누군가 낮게 웃었다. "만날 저러고 있잖아. 뭐 재밌다고 사냐 저렇게." 다른 목소리가 맞장구쳤다. 도훈은 눈만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반응할 가치가 없었다. 반응하면 재밌어할 놈들이었다. 반응하지 않으면 지루해할 놈들이었다. 둘 다 상관없었다. 그날 저녁, 도훈은 할아버지의 유품 상자를 열었다. 돌아가신 지 사흘째였다. 장례식은 조용히 끝났다. 친척들도 몇 없었다. 문상객보다 화환이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했다.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도훈을 키운 건 할아버지였다. 그 할아버지도 이제 없었다. 집 안이 이상하게 넓어 보였다. 낡은 나무 상자였다. 방 한쪽 벽장 깊숙이 처박혀 있던 것을 도훈이 겨우 찾아냈다. 뚜껑을 여니 곰팡내가 올라왔다. 오래된 종이 냄새, 먼지 냄새. 안에는 오래된 사진 몇 장, 편지 뭉치, 그리고 열쇠 하나가 있었다. 사진은 흑백이었다.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가 어딘가에 서 있었다. 배경은 알 수 없었다. 편지는 봉투도 없이 접혀 있었다. 펼쳐볼까 하다가 관뒀다. 지금은 그것보다 눈에 걸리는 게 있었다. 검은 쇠로 된 열쇠였다. 손잡이 부분에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원과 그 안을 가로지르는 선. 본 적 없는 모양이었다. 흔한 자물쇠 열쇠도 아니고, 장식용도 아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도훈은 열쇠를 집어 들었다. 손끝이 저렸다. 이상하네. 단순한 쇠붙이일 뿐인데 손에 쥐는 순간 확신 같은 게 밀려왔다. 이게 중요하다는 확신. 왜인지는 몰랐다.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도훈은 열쇠를 뒤집어 보고, 문양을 손끝으로 쓸어보고, 다시 상자에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 버릴 수 없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다음 날 학교에서, 같은 반 놈이 도훈의 가방을 발로 툭 찼다. 가방이 옆으로 밀려나며 책상 다리에 부딪혔다. 탁. "뭐야, 눈빛이 왜 그래." 놈이 비웃으며 말했다. 주변에 앉은 애들이 이쪽을 힐끔거렸다. 평소라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을 거다. 가방을 주워 들고, 아무 말 없이, 자리로 돌아갔을 거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도훈은 놈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시선이 부딫혔다. "뭐가." 짧게 되물었다. 놈의 표정이 흔들렸다. 눈썹이 한 번 꿈틀거리고, 입가의 웃음이 애매하게 굳었다. "어, 뭐 이 새끼 오늘 왜 이래." 주변 애들이 웅성거렸다. "쟤 왜 저래." "뭐 잘못 먹었나." 도훈은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그냥 가방을 주워 들고 자리로 갔다. 등 뒤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쟤 뭐 잘못 먹었나." 웃겼다. 뭘 잘못 먹은 게 아니라, 뭘 얻은 거지. 교복 주머니 속 열쇠가 만져졌다. 차가운 쇠붙이인데 이상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도훈은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을 보고 있으면 자꾸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다. 학교 뒤편에 오래된 사당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발걸음이 빨라지는, 뒤를 돌아보게 되는 그런 기분. 할아버지가 가끔 그 근처에서 서성이던 걸 본 기억이 있었다. 한 번은 물어본 적도 있었다. "할아버지, 저기 왜 자꾸 가?" "아무것도 아니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했다. 왜 하필 그 생각이 지금 나는 거지. 도훈은 몸을 일으켰다. 창밖은 어두웠다. 가만히 앉아서 열쇠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봤다. 문양이 어둠 속에서도 눈에 들어왔다. 결국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이유를 설명할 순 없었다. 그냥 발이 먼저 움직였다. 학교 뒤편은 인적이 없었다. 가로등도 하나 꺼져 있었다. 깜빡거리다 완전히 나가버린 듯한 가로등이었다. 사당은 예전보다 더 낡아 보였다. 기둥에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고, 지붕 한쪽이 조금 기울어 있었다. 낮에 볼 때보다 밤에 보니 훨씬 커 보였다. 문 앞에 서자 열쇠가 손안에서 뜨거워졌다. 뜨끈. 도훈은 놀라 열쇠를 놓칠 뻔했다. 뭐야, 이거. 손바닥이 벌게질 정도의 열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확실히 뜨거웠다. 체온과는 다른 열이었다. 확인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가는 것도 이상했다. 열쇠 구멍은 이상하게도 그 열쇠와 정확히 맞아 보였다. 원래 있던 구멍인지, 아니면 지금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 낮에 지나갈 때는 저런 구멍을 본 적이 없었다. 착각이겠지, 하고 넘기려 했지만 손은 이미 열쇠를 구멍 쪽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열쇠를 넣었다. 딱 맞았다. 돌렸다. 덜컹. 문이 스스로 열렸다. 도훈은 한 발 물러섰다. 문을 밀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열렸다는 게 이상했다. 안쪽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푸른빛이었다. 전등 불빛도 아니고, 달빛도 아니었다. 본 적 없는 색의 빛이었다. 도훈은 뒷걸음질쳤다. 이게 뭔데. 머릿속으로는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빛이 그를 끌어당기듯 확 빨아들였다. 발밑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위아래도, 앞뒤도 구분되지 않았다.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웅웅.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 같기도, 벌레 떼가 우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모든 게 캄캄해졌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 도훈은 딱 한 가지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도 여기 들어갔던 걸까. 답을 들을 방법은 이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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