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복도 끝, 상급생 셋이 하급생 하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낡은 체육관 뒤편 특유의 시멘트 냄새가 훅 끼쳤다.
"돈 없다니까요."
하급생 애가 벌벌 떨며 말했다.
"없는 게 아니라 안 주는 거잖아."
상급생 중 하나가 애의 어깨를 툭툭 밀었다.
도훈은 지나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원작 설도훈이라면 그냥 지나갔을 장면이었다.
아니, 지나가는 게 아니라 저 무리에 껴서 같이 웃고 있었을 장면이었다.
그런데 몸이 먼저 움직였다.
도훈은 상급생의 팔을 붙잡았다.
턱.
"뭐야, 이 새끼."
상급생이 눈을 부라렸다.
눈매가 사나웠다.
어깨도 도훈보다 한 뼘은 더 넓었다.
"놔주라고."
도훈이 짧게 말했다.
목소리에 별다른 힘이 들어가진 않았다.
그냥 사실을 전달하는 투였다.
"너 설도훈이지? 이름값 못하네. 원래 이런 거 안 끼는 놈이잖아."
맞는 말이었다.
원작의 설도훈이라면 오히려 저 무리에 껴서 웃고 있었을 상황이었다.
그것도 제일 앞에서, 제일 신나서.
"오늘부터 바뀌었어."
도훈이 대충 받아쳤다.
상급생 무리는 잠시 서로 눈치를 보았다.
눈빛이 오갔다.
누가 먼저 물러나나, 하는 눈치싸움이었다.
결국 상급생이 손을 털며 하급생을 놓았다.
"됐다, 됐어. 귀찮게."
무리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귀찮은 일 만들 필요 없다는 눈치였다.
설도훈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무게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급생 애가 도훈을 올려다봤다.
눈에 물기가 살짝 어려 있었다.
"고, 고맙습니다."
"됐어. 다치기 전에 튀어."
도훈은 손을 휘휘 저었다.
애가 후다닥 뛰어갔다.
운동화 밑창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타박타박타박.
그때 복도 끝에서 서린이 나타났다.
숨이 살짝 가빴다.
누가 저기서 소란이 났다는 얘기를 듣고 뛰어온 모양이었다.
"방금 무슨 일이었어."
서린이 도훈을 향해 물었다.
표정이 평소보다 조금 덜 날카로웠다.
평소라면 도훈 근처에 사람이 몰려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살을 찌푸렸을 텐데.
"별거 아니야."
도훈은 짧게 넘겼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설명하면 오히려 의심을 살 것 같았다.
서린은 뭔가 말하려다 그냥 지나쳤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하지만 지나가면서 도훈을 한 번 더 돌아본 건, 분명히 봤다.
작은 변화였다.
하지만 시작이었다.
작다면 작은 균열.
그 균열이 어디로 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담임 고은채가 과제를 걷었다.
"자, 다들 냈지?"
작고 동그란 체구의 여자 교사가 종이를 세며 다녔다.
분필 가루가 소매 끝에 하얗게 묻어 있었다.
한 명씩 종이를 내밀었다.
고은채는 그걸 받아 쌓으며 자리를 옮겼다.
"설도훈, 너 낸 거 맞아?"
고은채가 도훈의 자리 앞에서 멈췄다.
놀란 표정이었다.
"낸 거 맞는데요."
도훈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어, 진짜네. 세상에."
고은채가 종이를 들고 눈을 크게 떴다.
종이를 뒤집어 보고, 다시 앞을 보고, 또 뒤집었다.
뭔가 위조는 아닌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이런 적이 없었는데."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설도훈이 과제를 냈다고?"
"진짜야?"
"야, 나 눈으로 봤어. 진짜 냈어."
작은 소란이 순식간에 퍼졌다.
몇몇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도훈 쪽을 쳐다보기까지 했다.
도훈은 그 반응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게 이렇게 화제가 될 일인가.
그만큼 원작의 설도훈이 최악이었다는 뜻이었다.
과제 한 장 내는 게 뉴스거리라니.
고은채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종이를 옆에 챙기며 다음 자리로 넘어갔다.
넘어가면서도 한 번 더 도훈을 돌아봤다.
며칠이 지났다.
도훈은 매일 지각 없이 등교했다.
과제는 빠짐없이 냈다.
규율에 걸리는 일도 만들지 않았다.
하급생을 괴롭히는 애들이 보이면 슬쩍 끼어들었다.
복도에서 소리치는 무리를 보면 그냥 옆으로 걸어가서 팔 하나를 붙잡았다.
그것만으로 대부분 끝났다.
이름값이라는 게 이럴 때 쓸모가 있었다.
급식실에서는 남은 빵을 몰래 챙겨가려는 후배에게 그냥 못 본 척 해줬다.
전에는 그런 걸 트집 잡아 돈을 뜯던 게 원작 설도훈이었다.
작은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설도훈 요즘 이상해."
"뭐가 씌었나."
"근데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복도에서 스치는 말들이 조금씩 바뀌었다.
처음엔 의심, 다음엔 관망, 그다음엔 알게 모르게 섞이는 호감.
서린도 예전처럼 대놓고 날을 세우지 않았다.
대신 가끔 도훈을 힐끔거리는 눈치가 늘었다.
말은 걸지 않았지만, 시선이 먼저 갔다.
하린은 매일 도훈에게 다가와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진짜 달라졌어, 도훈아."
"뭐가."
"모르겠는데 그냥 좋아 보여."
하린이 배시시 웃었다.
"전에는 뭐랄까, 가까이 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안 그래."
"그건 다행이네."
도훈이 심드렁하게 받았다.
도훈은 그 웃음을 받으며 생각했다.
좋아, 이대로면 서린 쪽도 슬슬 마음이 열릴 것 같은데.
계산이 나쁘지 않았다.
평판이라는 건 생각보다 빠르게 돈다.
그리고 한 번 돌기 시작하면 관성이 붙는다.
하지만 그 생각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점심시간, 복도 너머에서 한 무리가 몰려다녔다.
중심에 선 남학생이 눈에 띄었다.
금발에 가까운 밝은 머리색, 잘 재단된 교복, 여유로운 걸음걸이.
주변 애들이 자연스럽게 그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냥 다들 그쪽으로 쏠렸다.
강태오.
원작의 진짜 주인공.
도훈은 그 이름을 속으로 되새기며 걸음을 멈췄다.
저놈이 이제 등장하네.
타이밍이 딱 맞았다.
설도훈이 조금씩 자리를 잡으려는 이 시점에.
원작 그대로라면, 강태오는 지금부터 서린과 얽히기 시작해야 했다.
강태오가 걸어가는 방향에, 서린이 있었다.
강태오가 서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어딘가 껄렁했다.
입꼬리는 올라갔는데 눈은 서린을 재는 것 같았다.
"서린, 오늘 시간 있어?"
강태오가 물었다.
서린의 표정이 굳었다.
주변 애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쪽으로 몰렸다.
숨죽인 웅성거림이 복도를 채웠다.
도훈은 그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원작대로라면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