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교실 문을 열자 소음이 뚝 끊겼다.
도훈은 그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들 시선을 피하거나, 아니면 아예 정면으로 노려봤다.
책상 위에 엎어져 있던 몇몇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는 휴대폰을 만지다 화면을 꺼버렸다.
분필 가루 냄새가 코를 찔렀다.
"또 지각이네."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들렸다.
앞자리에서 붉은 머리 여학생이 일어섰다.
키가 크고, 눈빛이 매서웠다.
학급 완장을 차고 있었다.
한서린.
도훈은 그 이름을 곱씹었다.
메인 히로인.
원작 표지에 박혀 있던 그 얼굴이 지금 눈앞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수업 시작 삼 분 전이야."
서린이 팔짱을 꼈다.
"설도훈, 매번 이런 식이면 곤란해."
"세 시간에 삼 분이면 오차 범위 아닌가."
도훈이 대충 받아쳤다.
순간 교실이 서늘해졌다.
서린의 눈썹이 확 올라갔다.
"장난할 기분 아니야."
"난 항상 장난할 기분인데."
도훈은 자리로 걸어가며 어깨를 으쓱했다.
뒤에서 누군가 킥킥거렸다가 서린의 눈치에 조용해졌다.
서린이 뭐라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대신 눈으로 도훈의 뒤통수를 쏘아붙였다.
그 시선이 등에 그대로 박히는 게 느껴졌다.
자리에 앉으며 도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원작에서도 이랬지.
첫 등장부터 서린한테 찍히는 게 설도훈의 클리셰였다.
기억이 맞았다.
교과서를 꺼내는 척하며 도훈은 곁눈질로 서린을 살폈다.
완장을 매만지는 손가락, 곧게 편 허리, 흐트러짐 없는 앞머리.
전형적인 모범생, 전형적인 히로인.
그리고 전형적으로 나 같은 놈을 싫어하지.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띠링—
칠판 앞에 선 교사가 출석부를 펼쳤다.
도훈은 창밖을 보며 딴생각에 빠졌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 도훈은 창가에 서서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멀리서 축구공 튀는 소리가 들렸다.
"도훈아."
밝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돌아보니 은발의 작은 여학생이 웃고 있었다.
유하린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로 인사하네."
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오늘 좀 다른 느낌이야."
"다른 느낌이 뭔데."
"모르겠어. 그냥 그래."
하린이 어깨를 폭 펴며 웃었다.
원작에서도 이런 캐릭터였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밝고, 인기 많고.
도훈은 그 웃음을 보며 속으로 계산을 굴렸다.
하린은 서린이랑 제일 가까운 사이지.
같이 등교하고, 같이 하교하고, 도서관도 같이 다니고.
원작 초반 삼십 페이지 안에 그 둘이 붙어 있는 장면이 대체 몇 번이었는지.
하린을 통하면 서린에게 접근할 실마리가 생길지도 모른다.
좋아, 이건 써먹을 수 있겠다.
"저기, 도훈아."
하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린이가 좀 예민한 애야. 나쁜 애는 아닌데."
"알아."
도훈이 짧게 답했다.
"어떻게?"
하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이 헛나갔다.
씨발.
"그냥 그런 것 같아서."
도훈은 얼른 말을 돌렸다.
하린이 잠시 도훈의 얼굴을 살폈다.
의심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냥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너 되게 눈치 빠르네."
"그런 편이야."
"흠."
하린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종이 울리자 손을 흔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도훈은 그 뒷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첫 접점은 성공.
점심시간, 도훈은 구내식당 구석에 혼자 앉아 있었다.
숟가락으로 밥을 뒤적이며 원작 기억이 계속 머릿속을 스쳤다.
한서린 루트.
서린은 규칙과 원칙을 극단적으로 중시하는 캐릭터였다.
동시에 하급생 괴롭힘 사건에 목숨 걸고 뛰어드는 정의감이 있었다.
과제 제출, 규율 준수, 약자 보호.
서린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세 가지.
그리고 설도훈은 그 세 가지를 전부 어겼던 캐릭터였다.
지각, 과제 미제출, 하급생 놀리기.
원작 오프닝에서 설도훈이 하는 짓들이 정확히 그거였다.
미친놈이었네, 진짜.
도훈은 식판을 내려다보며 픽 웃었다.
지각도 하고, 과제도 안 내고, 하급생도 놀리고.
세 개 다 만점으로 채워서 밉보이는 게 무슨 재주야.
반대로 하면 되는 거잖아.
서린이 싫어하는 걸 안 하고, 좋아하는 걸 하면.
간단한 계산이었다.
어차피 이 세계에서 정체를 들키지 않는 이상, 아무도 도훈이 결말을 안다는 걸 모른다.
이건 반칙이 아니라 전략이다.
도훈은 젓가락으로 나물을 집으며 다음 계획을 세웠다.
일단 지각은 오늘부터 끊는다.
과제도 밀리지 않고 낸다.
그리고 하급생 괴롭힘 이벤트.
그 이벤트, 오늘이었나.
기억을 더듬는 사이 손끝이 저릿했다.
날짜를 정확히는 못 짚었지만 느낌이 그랬다.
곧 있을 거야.
도훈은 식판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을 나서며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수업까지 십 분 남짓.
복도는 아직 한산했다.
오후 수업이 시작될 무렵, 복도에서 소란이 들렸다.
"야, 놓아 줘, 놓아 줘!"
어린 목소리였다.
하급생 하나가 상급생 무리에게 붙잡혀 있었다.
도훈은 걸음을 멈췄다.
이 장면, 기억났다.
원작 3화 즈음에 나오는 이벤트였다.
서린이 이 장면에서 하급생을 구해주는 걸로 첫 호감도 상승 이벤트가 발동한다.
근데 지금 서린은 안 보이네.
어디 있는 거지.
도훈은 주변을 훑었다.
복도 끝, 계단 쪽, 창문 너머.
붉은 머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설마 오늘이 아니었나.
아니면 서린이 늦는 건가.
하급생을 밀치던 상급생 하나가 손을 들어 올렸다.
퍽—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찰나, 도훈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