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공략집 다 외웠는데 혐오라니

5화

강태오는 서린 앞에서 웃음을 지운 채 서 있었다. 복도 끝,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빛이 두 사람 사이에 비스듬히 걸쳐 있었다. "시간 있냐고 물었잖아." "없어." 서린이 딱 잘라 답했다. "매번 그러네." 강태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그렇게 없어 보이나." "그런 얘기가 아니야." 서린이 지나가려 하자, 강태오가 팔을 뻗어 벽을 짚었다. 가로막는 자세였다. 탁. 팔이 벽에 닿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잠깐이면 되는데." "놔." 서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주변을 지나던 학생 몇이 흠칫 걸음을 늦췄다. 그러곤 못 본 척, 다시 속도를 냈다. 누구도 멈춰 서지 않았다. 도훈은 더 볼 것 없이 걸음을 옮겼다. 원작에서 이 장면, 알고 있었다. 초반부 강태오의 전형적인 접근 이벤트. 대부분의 루트에서 강태오는 이 시점에 서린에게 밀어붙이듯 접근한다. 서린이 거부하면, 그 뒤로 은근한 괴롭힘이 시작된다는 설정이었다. 괴롭힘의 종류도 다양했다. 소지품 훼손, 뒷담화, 은근한 따돌림. 루트에 따라 정도만 다를 뿐, 시작점은 똑같았다. 지금이 딱 그 지점이었다. 도훈은 두 사람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뭐 하냐." 짧게 던졌다. 강태오가 시선을 돌렸다.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설도훈?" "이름은 아네." "이 학원에 네 이름 모르는 애가 있겠냐." 강태오가 픽 웃었다. "불성실한 걸로 유명하잖아." "요즘은 아닌데." "소문은 들었어. 갑자기 착해졌다며." 강태오가 팔을 내리며 도훈을 훑어봤다. 발끝부터 얼굴까지, 값을 매기는 듯한 눈빛이었다.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지만." "꿍꿍이 없어. 그냥 사람 좀 가로막지 말라고." 강태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지금 나한테 그런 말 할 처지냐?" "처지가 무슨 상관이야. 싫다는데 계속 붙잡고 있잖아." "내가 언제 붙잡았어." 강태오가 억울하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대화하자고 한 건데." "대화는 상대가 응해야 대화지." 도훈이 서린을 한 번 슬쩍 보고 다시 강태오를 봤다. "싫다는데 벽까지 짚으면 그건 대화가 아니라 협박이야." 강태오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봤다. 누군가 휴대폰을 슬쩍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강태오의 얼굴이 굳었다.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너 이런 애였어?" "어떤 애였는지는 모르겠고." 도훈이 어깨를 폈다. "지금은 이런 애야." 강태오가 도훈을 잠시 노려봤다.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여기서 더 밀었을 때 이득이 있을지, 손해가 있을지 재는 듯한. "기억해둘게, 설도훈." 짧게 말하고 강태오는 몸을 돌렸다. 무리를 이끌고 사라졌다. 발걸음 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다. 지켜보던 학생들도 하나둘 흩어졌다. 방금까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복도는 다시 평범해졌다. 서린은 그 자리에 남아 도훈을 봤다. "굳이 나설 필요 없었어." "필요 없어도 했어." 도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쟤 뒤끝 있는 애야." "알아." "알면서 그랬어?" "응." 서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에서 뭔가를 재는 기색이 스쳤다. 그러다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고마워."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확실히 들렸다. 도훈은 순간 멍했다. 원작에서 서린이 이렇게 순순히 고마움을 표현하는 장면, 본 적 없는데. 원래 서린은 이런 상황에서도 딱 이 정도였다. "굳이 나설 필요 없었어." 거기서 끝. 고맙다는 말은 없었다. 적어도 도훈이 알던 원작 텍스트 안에서는. 뭔가 앞당겨진 느낌이었다. 좋은 신호인가, 아니면. 서린은 곧 표정을 다잡고 자리를 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걸어갔다. 도훈은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신뢰는 쌓이고 있다. 그건 확실하다. 근데 강태오를 정면으로 건드린 건, 계획에 없던 변수였다. 원작에서 설도훈은 강태오와 거의 접점이 없는 캐릭터였다. 지나가는 조연 중 하나, 그 정도. 강태오 입장에서는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존재였을 거다.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강태오의 기억 속에 이름이 박혔다. "기억해둘게"라는 말,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저런 부류는 꼭 뒤에서 뭔가를 한다. 좋은 방향인지 나쁜 방향인지, 아직 모른다. 도훈은 복도를 걸으며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변수 하나가 늘었다. 계획을 다시 짜야 하나. 아니, 아직은 지켜볼 때다. 그날 밤, 도훈은 기숙사 방에 앉아 열쇠를 꺼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할아버지의 편지가 다시 떠올랐다. 돌아가는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 한 줄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돌아갈 방법이 뭔지, 아직 아무 실마리도 없었다. 열쇠가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른다. 문이 있다는 것만 알 뿐, 그 문이 어디 있는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세계는 애초에 여자들을 공략 대상으로 두고 짜인 구조였다. 서린이든 하린이든, 결국 누군가의 '루트'로 소비되도록 만들어진 존재들. 그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도훈은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렇게 움직이는 게 맞는 건가. 서린에게 다가가는 것도, 신뢰를 쌓는 것도. 결국 도훈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다. 그 사실을 서린은 모른다. 도훈은 열쇠를 손에 쥔 채 눈을 감았다.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때, 창밖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훈은 눈을 떴다.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봤다. 어두운 정원 한구석, 강태오가 몇몇 학생들과 서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웃고 있었다. 하지만 웃음이라기엔 너무 차가웠다. 도훈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강태오 옆에 선 학생 하나가 뭔가를 손짓하며 이쪽을 가리켰다. 그 손끝이 정확히 도훈의 방 창문을 향했다. 뭔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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