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는,
자율학습이 끝난 복도에 불이 하나씩 꺼지는 걸 보면서, 열한 살 여름의 그 강가를 떠올렸다. 매미 소리가 귀를 찌르던 날이었고, 물비린내가 코끝에 진하게 감겨오던 오후였다. 넷이서 슬리퍼를 벗어 던지고 발목까지 물에 담근 채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던 것도 기억나는데, 그때 겨울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 물수제비를 뜨는 척을 하다가 자꾸 실패했고, 가을은 그 옆에서 낄낄 웃으며 조약돌을 골라 던져주었다. 여름은 발끝으로 물을 튕겨 우리 모두의 얼굴에 물방울을 뿌리며 장난을 쳤고, 나는 그 웃음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그저 물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여름이 문득 [우리 중에 누구 좋아하는 사람 있어?] 하고 물었을 때, 나는 대답 대신 물살을 발끝으로 휘저었다. 물 위로 잔물결이 퍼져나가는 걸 보면서,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그 정적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아직도 종아리에 남은 물의 서늘함으로 기억하고 있다. 매미 소리마저 잠시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던 그 짧은 순간, 나는 넷 중 누구도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겨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약속하자. 절대 연인 되지 말고, 고백도 하지 말고, 그냥 지금처럼 넷이서 계속 친구로만 있자고.] 그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단단했고, 어딘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을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여름은 헤헤 웃으며 그 위에 손가락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손가락을 걸었을 때, 그 애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나는, 그 순간 무언가가 가슴 안쪽에서 조용히 접혔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걸면서도 손끝이 떨렸던 것 같은데, 그마저도 다들 여름 햇살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심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벌써 무언가를 감추는 법을 알았다는 게. 열한 살짜리가 뭘 그렇게까지 숨기려 들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협정은 그 뒤로 십 년을 버텼다. 나는 셋을 똑같은 온도로 대하는 법을 익혔고, 여름에게 웃어준 만큼 겨울에게도 웃어주었으며, 가을이 짜증을 내면 여름에게도 똑같이 짜증을 받아주는 식으로 균형을 맞췄다. 생일 선물의 무게도, 문자를 보내는 빈도도, 심지어 눈을 마주치는 시간까지도 나는 세 사람 사이에서 저울질했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서운해할까 봐, 혹은 내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 보일까 봐 늘 조심스러웠다. 그게 옳다고 믿었다. 아니, 옳다고 믿어야만 했다는 게 정확했다.
그런데, 이제서야 왜, 그 여름날의 물소리가 이렇게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걸까.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균형이, 요즘 들어 자꾸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나조차도 그 이유를 정확히 짚어낼 수가 없어서, 자꾸 그날의 강가로 생각이 되돌아가는 것 같다.
신발주머니를 흔들며 운동장을 가로지르는데, 저 멀리 소프트볼부 훈련장에서 배트가 공을 때리는 소리가 텅, 하고 울렸다. 여름이었다. 그 애의 스윙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고, 나는 늘 그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는 버릇이 있었다. 타석에 선 여름의 뒷모습이 저 멀리서도 눈에 익어서, 어깨를 돌리는 방식이나 배트를 짚고 서 있는 자세만 봐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걸음을 멈춘 채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유독 저 소리에만 심장이 반응하는 걸까, 겨울의 목소리나 가을의 웃음소리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겨울이 내 이름을 부를 때도, 가을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툭 칠 때도 심장은 그저 평온했다. 그런데 저 배트 소리, 그 텅 하는 울림 하나에 왜 이렇게 가슴이 반응하는지, 나는 답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어리석었다, 십 년이나 걸려서야 겨우 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게. 협정을 맺던 그날,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그 순간에도, 내 마음은 협정 밖에 서 있었다는 것을.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스스로도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열한 살의 나는 그저 넷이 함께 있는 게 좋아서 협정에 손을 얹었다고 생각했는데, 스물한 살이 된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순전한 착각이었다. 나는 이미 그때부터 여름 한 사람만을 다르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훈련장 철망 너머로, 여름이 배트를 어깨에 걸치고 동료들과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웃음이 유난히 환해서, 나는 잠깐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다른 애들이 그 애를 향해 손을 흔들면, 여름은 특유의 시원스러운 웃음으로 답하곤 했는데,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늘 가슴 한구석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십 년간 지켜온 무언가가 통째로 무너질 것 같아서, 나는 애써 시선을 거뒀다.
교문을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늦여름의 노을이 붉게 번지고 있었는데, 그 색이 이상하게도 불안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뭔가가 서서히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예감이 들었을 뿐이다. 하늘 끝에서부터 번져오는 붉은 기운이 마치 핏물처럼 짙어져서, 나는 괜히 걸음을 서둘렀다. 골목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가로수 잎사귀 사이로 스며드는 노을빛이 자꾸만 눈을 찔렀다.
집으로 가는 골목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강여름]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고, 나는 아무 의심 없이 전화를 받았다. 평소라면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을 텐데, 오늘은 왠지 손끝이 먼저 반응했다. 이유도 모른 채,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며 걸음을 늦췄다.
"어, 여름아."
대답이 없었다. 대신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침착하지만 어딘가 다급함이 섞인, 어른의 음성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바람 소리 같은 잡음이 섞여 들었고, 그 뒤로 다급하게 걸어가는 발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도현 학생 맞습니까?"
손끝이 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목덜미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훅 끼쳐왔다.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여름이 아버지입니다."
그 한마디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노을이 눈앞에서 갑자기 무너지듯 어두워졌다. 방금까지 붉게 물들어 있던 하늘이, 순식간에 낯선 색으로 뒤틀리는 것처럼 보였다. 심장이 쿵, 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귓속에서 울렸다. 아버지의 목소리 뒤로 이어질 말이 무엇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 나는 그저 숨을 멈춘 채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