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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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담으로 지정하고 싶습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겨울과 가을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히는 걸 느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크게 울렸다. 병실 안의 형광등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고, 창밖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이 하필이면 여름이 아버지의 어깨 위에 얹혀 있어서, 나는 그 빛의 방향까지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제가요." 겨우 그 한마디를 뱉었을 때, 여름이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이가 유일하게 스포츠 기억은 온전하니까, 소프트볼부 활동을 매개로 접근하는 게 가장 자연스러울 겁니다. 학생회나 다른 활동보다는, 당신이 낫다는 판단이에요."
그 판단이 어디까지 사적인 감정과 무관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여름이 아버지의 눈빛에는 어떤 절박함이 있었고, 그 절박함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알겠습니다] 외에는 없었다. 병실을 나오면서 뒤돌아본 여름의 얼굴은, 여전히 낯선 눈으로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 낯섦이, 나를 이 자리로 밀어넣은 이유이기도 했다.
학교로 돌아온 다음 날부터, 상황은 예상보다 빠르게 굳어졌다. 담임은 조회 시간에 [강여름 학생이 교통사고로 일부 기억을 잃었으니, 배려해달라]는 짧은 안내만 전했고, 그것만으로도 교실 안 공기는 이상하게 무거워졌다. 나는 그 공기를 등 뒤로 느끼면서도 앞을 보고 있어야 했다. 누군가의 시선이 뒷목에 닿는 것 같은 착각이 자꾸 들었고, 손끝이 괜히 차가워졌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누군가는 [사실은 도현이랑 사귀다가 헤어져서 그런 거 아니냐]는 말을 흘렸고, 다른 누군가는 [학생회가 이 일로 뭔가 이득을 보려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얹었다. 나는 그 말들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복도를 지날 때마다 뚝 끊기는 대화들, 나를 보고 급히 시선을 돌리는 얼굴들에서, 어떤 말들이 오가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한심했다.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자꾸만 뭔가 잘못한 사람처럼 움츠러드는 내 태도가.
겨울은 이 여론을 가장 먼저 정면으로 받아냈다. 학생회 부회장이라는 위치가, 이 사건을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학교 전체의 화두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학생회 차원에서 여름이 복귀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짜자는 얘기가 나왔어." 그날 학생회실에서, 겨울은 평소보다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창밖으로 늦가을 바람이 창틀을 흔들고 있었고, 그 소리가 겨울의 목소리 사이사이에 끼어들어서 대화가 자꾸 끊기는 느낌이었다. "근데 그게 결국은 너를 중심으로 짜여야 한다는 게, 문제야."
"문제라는 게 무슨 뜻이야." 나는 되물었고, 겨울은 볼펜을 신경질적으로 두 번 돌리고서야 대답했다. "학생회에서 너를 여름이 전담 파트너로 세우면, 다른 애들 입에서 너랑 여름이 얘기가 더 부풀려질 거야. 그게 싫다는 거야, 나는."
그 말투는 평소의 이성적인 겨울답지 않았다. 나는 그 애의 눈빛에서, 냉정함 아래 숨겨진 어떤 균열을 처음으로 봤다. 겨울은 늘 문제를 앞에 두면 감정을 걷어내고 논리부터 세우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논리보다 감정이 먼저 튀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묻고 싶었지만, 묻는 순간 그 균열이 더 크게 벌어질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내가 다시 물었을 때, 겨울은 볼펜을 내려놓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몰라. 그냥... 네가 그 자리에 있는 게, 자꾸 신경 쓰인다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겨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나는 그 등을 보면서, 뭔가를 더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 스스로가 답답했다.
그날 오후, 나는 가을을 매점 뒤 계단에서 마주쳤다. 그 애는 나를 보자마자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섰다. 계단 그늘 아래서, 가을의 얼굴은 반쯤만 빛을 받고 있었고 나머지 반쯤은 그늘에 잠겨 있어서, 표정을 제대로 읽기가 어려웠다. "들었어. 너 이제 여름이 전담이라며."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내가 원해서 된 게 아니야."
"알아.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가을이 한 발짝 다가섰다. 평소라면 삼각김밥을 던지듯 건넸을 그 손이, 지금은 허공에서 어색하게 멈췄다. "협정 기억나? 우리 균등하게, 아무도 특별하게 안 만들기로 했잖아. 근데 이제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여름이는 너 말고 아무도 기억 못 하는데."
"내가 그걸 원한 게 아니라니까."
"원하지 않았어도, 지금 너는 이미 그 자리에 있잖아!" 가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그 순간, 그 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걸 봤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어서 그런 거라는 걸, 나는 뒤늦게 알아챘다. 가을은 늘 감정을 숨기지 않는 애였는데, 지금은 그 감정 밑에 다른 무언가를 숨기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뭔지, 나는 알 것 같으면서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협정 지켜." 가을이 낮게 뱉었다. "안 그러면 우리 다 끝이야."
"끝이라는 게, 무슨 뜻이야." 나는 물었지만, 가을은 대답 대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이 평소보다 작아 보였다. 늘 당당하게 걷던 걸음이 지금은 어딘가 무너질 듯 위태로웠고, 나는 그 걸음을 붙잡아야 하는지 그냥 보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 말을 남기고 계단을 내려가는 가을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협정을 지키라는 그 말이, 정작 협정을 가장 흔들리게 하고 있다는 걸, 가을 자신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계단 난간을 손으로 짚고 서서, 오후의 햇살이 조금씩 기울어가는 걸 지켜봤다. 그림자가 계단 위로 길게 늘어졌고, 그 그림자 끝이 마치 뭔가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괜히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 날, 나는 여름과 처음으로 병원 재활실에서 마주 앉았다. 재활실 안은 소독약 냄새와 낡은 매트리스 냄새가 섞여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겨울을 앞둔 나무들이 잎을 거의 다 떨어뜨린 채 서 있었다. 낯선 눈으로 나를 보던 그 애가, 소프트볼 얘기가 나오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오빠도 소프트볼 좋아해요?" 그 호칭이, 이상하게 가슴을 후벼팠다.
나는 대답 대신 잠시 말을 삼켰다. 그 애의 눈에는 나에 대한 어떤 기억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저 [소프트볼부 담당 오빠]라는 껍데기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껍데기가 지금 나를 부르는 유일한 이름이라는 사실이, 자꾸만 어딘가를 긁어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겨울과 가을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렸다. 이 어색한 첫 만남이 시작되는 순간에도, 나는 그 둘의 표정이 무너지는 걸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