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사랑 금지 협정이라니

3화

나는, "여름이 아버지입니다."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전화를 받기 직전까지도 나는 여름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별것 아닌 이야기였다. 저녁에 뭘 먹었냐는 둥, 내일 시험 범위가 어디까지냐는 둥, 그런 사소한 말들을 주고받다가 갑자기 "도현아, 나 좀……" 하고 말이 끊겼고, 그 뒤로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뭔가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낮게 깔리는 신음. 나는 그때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디 발이라도 삐끗했나 보다, 정도로. "여름이가 사고를 당했어요. 지금 XX병원 응급실에 있는데, 도현 학생과 통화하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어서요."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그 침착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의사라는 직업이 몸에 새긴 침착함인 걸 알면서도, 나는 그 담담한 어조에서 어떤 절박함을 읽어냈다. 나는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다. 신발을 짝짝이로 신은 것도 버스에 타고 나서야 알았다. 병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손끝이 하얗게 될 정도로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창밖 풍경이 흐르는 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머릿속에는 오직 낮에 보았던 여름의 흔들리는 자전거 바퀴만 반복해서 떠올랐다. 그 애는 평소보다 페달을 빨리 밟았고, 골목을 돌아나가는 순간 앞바퀴가 한 번 크게 휘청거렸다. 나는 그때 "야, 조심해" 하고 소리쳤고, 여름은 뒤도 안 돌아보고 손을 흔들며 "괜찮아, 나 자전거 잘 타" 하고 웃었다. 그 웃음이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 될까 봐, 손잡이를 쥔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그때 붙잡았어야 했나, 그때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으면서 왜 그냥 보냈을까. 버스가 신호에 걸려 멈출 때마다 나는 숨을 참았다가, 다시 출발할 때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그런 식으로 스무 번쯤 숨을 참았을 때, 병원 앞이었다. 응급실 앞에서 나는 겨울과 가을을 만났다. 둘 다 이미 도착해 있었고, 겨울은 평소의 단정함을 잃은 채 리본이 반쯤 풀린 상태로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으며, 가을은 손톱을 다 물어뜯은 흔적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겨울의 그 흐트러진 리본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평소라면 옷매무새 하나 흐트러지는 걸 못 견디던 애였다. 가을은 나를 보자마자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뗐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다물었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우리 셋 다,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나란히 서 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세 사람의 그림자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나서야, 여름이 아버지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흰 가운을 입은, 뇌신경외과 전문의라는 그 사람은, 여름과 눈매가 똑같았다. 그 익숙한 눈매를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안도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저 사람의 딱딱한 표정 뒤에 여름의 얼굴이 겹쳐 보여서, 나는 잠깐 숨을 죽였다. "큰 외상은 없습니다. 다만…" 그는 잠시 말을 끊었고, 그 정적이 우리 셋의 숨을 동시에 멈추게 했다. 나는 그 짧은 침묵 동안 온갖 최악의 상상을 다 했다. 뇌출혈, 반신불수, 그런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에 충격이 있었는데, 검사 결과가 좀 특이해요. 계통적 건망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특정 범주의 기억만 선택적으로 손실되는 경우예요." "특정 범주라는 게…" 겨울이 먼저 목소리를 냈다. 평소라면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했을 그 애의 말투가, 이번에는 떨리고 있었다. 겨울의 손끝이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게 보였다. "인간관계에 대한 기억입니다. 스포츠나 학업, 일상적인 지식들은 다 온전해요.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 특히 여러분 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지금은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그 말이 귀에 들어오는데, 이상하게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어딘가에서 울리는 안내방송 소리마저도 멀게 느껴졌다. 가을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하고 되물었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의사는 몇 가지 의학적 설명을 덧붙였다. 해마와 관련된 부위에 부분적인 손상이 있었고, 물리적인 충격이 특정 신경 회로에만 영향을 미친 드문 사례라고. 하지만 그 설명들은 하나도 귀에 남지 않았다. 남은 건 오직 한 문장, 여러분 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는 그 말뿐이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여름은 침대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몸에는 큰 상처가 없어 보였고, 표정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그 애의 옆얼굴에 옅게 걸려 있었고, 그 모습이 너무 평온해서 나는 잠깐 이 모든 게 다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익숙한 옆모습에 저도 모르게 안심하며 다가갔다. "여름아." 그 애가 나를 돌아보았다. 눈매가 우묵하게 그늘져 있었지만, 그 안에서 나를 향한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십 년 동안 봐온 그 눈이, 지금은 그저 낯선 사람을 향한 무심한 시선일 뿐이었다. "…누구세요?" 그 세 마디가, 지금까지의 십 년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처음 만났던 날부터, 매일같이 함께 등하교하며 나눴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시험을 망치고 울던 밤에 어깨를 빌려줬던 기억, 그 모든 게 이제 여름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겨울과 가을도 뒤따라 들어왔지만, 여름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낯선 시선을 보냈다. 겨울을 보고도 고개를 살짝 갸웃했고, 가을을 보고도 그저 낯선 방문객을 대하듯 예의 바른 표정만 지었다. 익숙한 얼굴들 앞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는 그 애를 보면서, 나는 가슴이 버석거리는 걸 느꼈다. 마치 오래 써서 낡은 종이가 손끝에서 부스러지듯이, 우리 셋이 여름과 함께 쌓아온 시간이 그 애 안에서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병실 밖으로 나오자, 여름이 아버지가 우리를 조용히 불러세웠다. 복도의 형광등 불빛이 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을 만들고 있었고, 그 그늘 아래에서 그는 잠시 우리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기억이라는 건, 관계 속에서 다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현 학생." 그의 눈이 정확히 나를 향했다. "당신이 여름이 곁에서 기억을 되짚는 걸 도와주면 좋겠는데. 학교에서도, 병원 재활 프로그램에서도, 당신을 전담으로 지정하고 싶습니다." 등 뒤에서 가을과 겨울의 숨소리가 동시에 멈추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내 뒤통수에 꽂히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왜 나여야 하는지, 그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여름이 아버지의 눈빛에는 어떤 확신이 담겨 있었는데, 그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순간부터, 우리 넷의 관계는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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