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혜가 쓰러지는 걸 보면서, 나는 무릎을 꿇었다.
힘이 빠진 게 아니었다. 다리가 스스로 접혔다.
"다혜야."
대답이 없었다. 얼어붙은 그녀의 눈은 여전히 놀란 표정 그대로였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뭔가가 명치 아래에서 뒤틀렸다. 방금까지 웃던 얼굴이었다. 방금까지, 내 옆에서 숨을 쉬던 사람이었다.
손을 뻗어 다혜의 어깨를 흔들었다. 딱딱했다. 서리가 이미 관절 사이까지 파고든 뒤였다. 이건 죽음이 아니라 정지였다. 시간이 그 자리에서만 멈춘 것 같았다.
바닥을 짚었다. 손바닥에 닿는 흙마저 차가웠다.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음마다 바닥에 서리가 번졌다. 세 걸음째에서 나는 그 서리가 심장 모양으로 갈라지며 퍼진다는 걸 알아챘다. 무의미한 관찰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엔 그런 것에라도 매달려야 했다.
"이제 너 하나 남았네."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근데 왜 안 도망가? 다들 도망갔는데."
목소리엔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비웃음 속에서도 어딘가 지쳐 있는 억양을 들었다. 상대는 벌써 몇 번이나 이런 걸 반복했을까. 다들 도망갔는데, 라는 말이 유난히 낡아 있었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리고 도망가고 싶지도 않았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냥, 이 자리를 떠나면 뭔가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았다.
무릎으로 선 채,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여리."
나는 그림자를 향해 불렀다.
"여리, 안에 있는 거 알아. 들려?"
그림자가 멈췄다.
"그 이름 부르지 마."
목소리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그건 걘 아니야."
"그럼 넌 누구야."
"난, 걔가 버린 부분이야."
말투가 순간 흔들렸다. 마치 오래전에 외운 대본을 읊다가 한 줄을 빠뜨린 사람처럼.
그 순간, 그림자의 손이 서리를 흩뜨리며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버린 게 아니라 지키려고 한 거 아니야?"
확신은 없었다. 그냥 게임 설정에서 짚어낸 추측이었다. 성녀 설하영은 배신당하고 저주받아 어려졌다. 그 순간 정신도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상처받은 아이, 다른 하나는 그 상처를 대신 짊어진 원한.
둘 다 그녀였다. 어느 쪽도 가짜가 아니었다.
이런 걸 마을 사람 1이 어떻게 알겠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살려면.
그림자의 붉은 눈이 흔들렸다.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해."
"몰라. 근데, 지금 니가 멈춘 거 보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가 봐."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티가 안 나길 바랐지만, 상대는 분명 들었을 거다. 그림자의 눈이 나를 훑었다. 마치 내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가늠하는 것처럼.
"영리하네."
낮은 웃음이 섞였다.
"근데 영리한 애들이 꼭 제일 먼저 죽더라."
순간 그림자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훨씬 빨랐다.
손이 내 목을 붙잡았다.
서리가 즉시 피부에 번지기 시작했다.
차가움이 뼈까지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숨을 쉬려고 했다. 안 됐다. 목 안쪽부터 얼어붙는 감각이었다. 시야 끝이 하얗게 번지고, 손끝의 감각이 사라졌다.
"그런 말로 날 멈출 수 있을 것 같아?"
숨이 막혔다. 눈앞이 흐려졌다.
그 순간, 뭔가가 몸 안에서 반응했다.
뜨거운 감각이었다. 서리와 정반대의, 타는 듯한 열기.
처음엔 심장 쪽에서 시작됐다. 그러다 갈비뼈를 타고 번지고, 어깨까지 퍼졌다. 이게 뭐지, 라는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경고 : 봉인된 인자 반응 감지]
[경고 : 회귀자 특성 발현 조건 충족]
낯선 문구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게임에서도 본 적 없는 시스템 메시지였다.
뭐야, 이건.
나는 마을 사람 1이었다. 조연도 못 되는 배경 인물. 회귀자라는 말은 이 세계관 어디에도 없었다. 성녀도, 용사도, 마왕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시야를 채운 저 문장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그 순간 몸의 통제가 나를 벗어났다. 손이 저절로 움직여 그림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림자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
나도 몰랐다. 대답할 수 없었다.
뜨거운 기운이 팔을 타고 올라와 온몸으로 퍼졌다. 아팠다. 살이 타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처음으로 그림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힘이 느껴졌다.
손목을 붙잡은 손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뭔가가 내 몸을 통해 흘러나가 상대에게로 옮겨가는 것 같았다. 열기가, 혹은 다른 무언가가.
그림자가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서리로 뒤덮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런 힘이 왜 니 안에 있어."
낮은 목소리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섞였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건 원래 있어서는 안 되는 힘이라는 것.
게임 스토리 어디에도, 마을 사람 1이 이런 힘을 가졌다는 설정은 없었다.
목을 짚었다. 서리로 얼었던 피부가 서서히 정상 체온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손끝이 저릿거렸다. 마치 방금 감전이라도 당한 것처럼.
그림자가 나를 응시했다. 붉은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계산되는 것 같았다. 도망칠지, 다시 덤빌지. 나는 그 눈을 마주 보면서도 다음 말을 준비하지 못했다. 뭘 더 말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냥 버티는 수밖에.
"오늘은 여기까지."
그것만 남기고, 여리의 몸이 그대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검은 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안개가 걷히는 자리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방금까지 목을 조르던 손의 감촉이 아직도 피부 위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혜의 시신, 승우의 시신, 정찰병의 시신.
유진은 아직 숨이 남아 있었지만, 서리가 절반 이상 몸을 덮고 있었다.
나는 무릎으로 기어 유진에게 다가갔다. 손이 떨렸다. 아직 뜨거운 감각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부지, 부지부장님."
유진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거, 그거 뭐였어요, 방금..."
목소리가 갈라졌다.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나를 보는 눈이 아니라, 방금 벌어진 일을 보는 눈이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몸에 남은 뜨거운 감각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손끝을 내려다봤다.
손등에 낯선 문양이 희미하게 떠올라 있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문양은 짧은 순간 반짝였다. 마치 각인처럼.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를 몇 번이나 문질러 봤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괜찮아, 유진아. 조금만 버텨."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진의 몸을 덮은 서리가 걷히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손을 대 봤다. 차가움이 즉시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쓰러진 여리에게 다가갔다. 숨은 쉬고 있었다. 서리에 덮인 몸에서, 인간의 체온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가까이서 본 여리의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작고 여렸다. 방금까지 나를 죽일 듯 노려보던 붉은 눈과는 완전히 다른, 그냥 잠든 아이의 얼굴이었다. 이 안에 두 개의 존재가 있다는 게, 눈앞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괜찮아."
내가 중얼거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몰랐다.
멀리서, 마을 어딘가에서 다시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주 작게. 아주 낮게.
여리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더 오래되고, 더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였다.
노래는 가사도 없었다. 그저 낮게 이어지는 선율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 슬픔 같은 게 느껴졌다. 오래 묵은, 삭을 대로 삭은 슬픔.
그 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아직 몰랐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손등에 남았던 문양의 잔열이 아직도 희미하게 느껴졌다. 사라진 게 아니라, 어딘가에 숨어든 것 같은 감각이었다.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