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박준서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지 사흘 만에, 나는 그를 직접 마주하게 됐다. 이서현과 함께 출연할 신작 드라마의 첫 리딩 자리였는데, 회의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그 남자를 살폈다. 훤칠한 키에 웃는 인상이 좋은, 어디서나 사랑받을 법한 얼굴을 한 그가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이서현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뭔가 미묘한 기류를 감지했다. 저 웃음이 단순한 반가움이 아니라는 걸, 나는 왜 이렇게 확신하는 걸까.
"서현 씨, 오랜만이에요." 다정한 말투로 인사하는 그와 달리 이서현은 짧게 고개만 까딱이며 자리에 앉았고, 나는 그 대조적인 반응이 그녀의 평소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어딘가 마음에 걸리는 걸 지울 수 없었다. 그녀 옆자리에 앉으며 대본을 펼치는 척했지만, 내 시선은 자꾸 박준서 쪽으로 향했다. 그는 리딩이 시작되기 전까지도 몇 번이나 이서현 쪽을 힐끔거렸는데, 그 시선에 담긴 게 단순한 동료로서의 관심인지, 다른 무엇인지 나는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리딩은 별다른 잡음 없이 흘러갔다. 대본을 읽어나가는 이서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고, 박준서는 그런 그녀를 상대역으로 맞춰가며 능숙하게 대사를 주고받았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프로다운 리딩이었다. 하지만 나는 회의실 구석에 앉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다른 배우들과는 미묘하게 다르다는 걸 느꼈다. 박준서가 이서현의 대사에 반응할 때마다 짓는 옅은 미소, 그 미소를 이서현이 철저히 무시하는 방식.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리딩이 끝난 후, 박준서가 로비까지 따라나와 이서현에게 말을 건네는 걸 나는 몇 발짝 뒤에서 지켜보았다. "오늘 점심 같이 먹을래요? 근처에 새로 생긴 곳이 있는데."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로비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걸 나는 미리 알고 있었기에, 그 상황이 심상치 않게 느껴져 손끝이 서늘해졌다. 저 사람은 알고 저러는 걸까, 모르고 저러는 걸까. 어느 쪽이든 상황이 좋게 흘러가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목덜미를 스쳤다.
이서현은 잠깐의 침묵도 없이 대답했다. "약속 있어요." 짧고 차가운 그 대답에 박준서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고, 로비 한쪽에서 셔터 소리가 연달아 울리는 걸 들으며 나는 아, 하는 탄식을 삼켰다. 얼른 다가가 상황을 정리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셔터 소리의 밀도로 알 수 있었다. 박준서는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뒷걸음질쳤고, 이서현은 그를 한 번 더 쳐다보지도 않은 채 로비를 벗어났다. 나는 그 뒷모습을 좇으며, 이 짧은 장면이 어떤 식으로 부풀려질지 머릿속으로 벌써 계산하고 있었다.
일이 커진 건 그날 오후였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이미 그 짧은 대화 장면이 영상으로 올라와 있었고, '이서현, 공연 동료 박준서 점심 제안 냉정하게 거절'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댓글창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손에 든 휴대폰을 놓칠 뻔했다. '역시 얼음공주', '박준서만 불쌍하다', '저러니 매니저들이 다 도망가지'. 악의로 가득 찬 문장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나는 그 댓글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면서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몇 줄만 읽으면 될 것을, 나는 스크롤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내려갔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녀의 표정 하나, 말투 하나를 근거로 한 사람의 성격 전체를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어째서 이렇게까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고,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넣듯 집어넣으며 애써 화면에서 눈을 뗐다.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팀장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이거 봤어?" 태블릿 화면을 내 앞에 들이밀며 묻는 팀장의 표정에서 평소와 다른 긴장이 읽혔다. "기사가 너무 빠르게 퍼지고 있어. 위에서도 대응 방안 요청 들어왔고."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단순히 약속이 있어서 거절한 걸로 아는데요. 왜 이렇게까지 부풀려진 건지." 팀장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서현 관련 기사는 늘 이래. 우리 방침상 일일이 대응 안 해. 그게 더 힘 빼는 일이거든."
"그래도 이번엔 좀 심한 것 같은데요." 나는 태블릿 화면을 손가락으로 넘기며 늘어나는 기사 목록을 눈으로 훑었다. 벌써 세 곳의 매체가 비슷한 제목으로 후속 기사를 냈고, 그 아래 달린 댓글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배로 늘고 있었다. 팀장은 내 표정을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너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마. 매니저가 배우보다 더 흔들리면 그게 더 문제야." 그 말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화면 속 그녀의 사진을 보며 마음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사무실을 나서면서도 나는 계속 휴대폰을 확인했다. 기사 제목은 조금씩 자극적으로 바뀌어갔고, 어느 순간부터는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추측성 문장들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서현, 박준서와 과거 스캔들 있었나' 같은 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렇게 왜곡된 걸까.
그날 저녁, 나는 대기실에서 홀로 짐을 정리하는 그녀를 발견했다. 평소보다 유난히 조용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잠시 문가에 서서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괜찮으세요?"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뭐가요." 방어적인 그 말투 속에 숨겨진 피곤함이 느껴져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기사 때문에 신경 쓰이실까 봐요."
그 말에 그녀가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화장대 조명 아래 그녀의 눈은 평소보다 조금 더 짙어 보였는데, 그 안에 담긴 감정이 피로인지 서운함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늘 있는 일이에요. 신경 안 써요."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 눈빛 속에서 뭔가 억눌린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짐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매니저님이 신경 쓰는 것도 뭐가 다른가요." 그 말에 나는 순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비꼬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지쳐서 나온 말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삼켰다.
그녀는 다시 가방을 챙기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나서기 직전, 그녀가 잠시 멈춰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매니저님이 그런 얼굴 하면, 제가 더 신경 쓰이니까."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대기실을 나갔고, 나는 그 자리에 한동안 서서 방금 들은 말의 의미를 되짚었다.
그녀가 자리를 뜬 뒤, 나는 혼자 대기실에 남아 방금 본 그 표정을 되짚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걸까, 하는 의문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가 신경 안 쓴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오히려 더 신경이 쓰였다. 그 담담함이 진짜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 쌓아온 방어벽인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의자에 걸터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여 지나갔다. 박준서의 웃는 얼굴, 이서현의 차가운 대답, 셔터 소리, 댓글창을 가득 채운 악의적인 문장들, 그리고 방금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까지. 이 모든 게 결국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것 같은데, 나는 아직 그 선의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에는 박준서라는 이름이 낯선 번호와 함께 떠 있었다. 나는 잠시 그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왜 이 사람이 나한테 전화를 거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강도윤 매니저님이시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시작된 그 전화가, 나는 왠지 이 소란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예감이 들어 손끝이 다시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는, 낮 동안 카메라 앞에서 보였던 여유로운 웃음과는 전혀 다른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