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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박준서와의 통화는 짧고 어색했다. "제가 오해를 산 것 같아서 연락드렸어요. 서현 씨한테 부담 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조심스러운 그 말투 속에서 나는 그가 이 소란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동시에 그 걱정 아래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다는 것도 감지했다. 마치 걱정이라는 포장지 아래 숨겨둔 진짜 속내가 따로 있는 것 같은, 그런 미묘한 온도차였다. "이해합니다. 저희 쪽에서도 대응은 하지 않을 예정이니 걱정 마세요." 최대한 사무적으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통화가 끝난 뒤에도 그의 목소리에 배어 있던 미묘한 아쉬움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한동안 화면만 들여다보다가, 나는 괜한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 걸까. 다음 날, 이서현의 스케줄을 확인하러 회사 자료실에 들렀다가 나는 우연히 예전 기사 스크랩북을 발견했다. 먼지 쌓인 캐비닛 구석에서 나온 그 낡은 파일을 별생각 없이 펼쳐보다가, 데뷔 초 그녀와 함께 활동했던 한 선배 배우의 이름이 적힌 페이지에서 손이 멈췄다. 종이가 누렇게 바랜 걸 보니 꽤 오래된 자료인 듯했는데, 스크랩된 기사들 사이에 끼워진 오래된 인터뷰 영상 링크를 클릭해보니 지금보다 훨씬 젊은 그녀가 카메라 앞에서 그 선배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저는 언니만 믿고 여기까지 왔어요.' 그 말이 유난히 마음에 걸려 나는 몇 번이나 그 장면을 되짚었다. 화면 속 그녀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경계도, 벽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누군가를 신뢰하는 눈빛이었다. 지금의 그녀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 뒤로 이어진 기사들을 살펴보니, 몇 년 전 그 선배 배우가 이서현의 사생활 정보를 언론에 흘렸다는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기사 제목만 훑어봐도 당시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었는데,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었지만, 그 사건 이후로 그녀의 인터뷰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걸 기사 날짜만 비교해도 짐작할 수 있었다. 웃음의 빈도가 줄고, 질문에 대한 대답이 짧아지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던 눈빛이 어딘가 비껴가는 듯한 시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믿었던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가슴 한쪽이 저릿해졌다. 사람을 잘 안 믿는다던 코디네이터의 말이 다시 떠오르며, 나는 비로소 그녀의 벽이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 스크랩북을 조심스레 덮으며, 나는 왠지 그녀의 오래된 상처를 몰래 훔쳐본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날 오후, 촬영장으로 향하는 길에 갑작스레 비가 쏟아졌다.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굵은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나는 급하게 와이퍼를 켜며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촬영장 입구에 서 있던 그녀를 발견했다. 처마 밑도 아닌 그저 건물 벽에 몸을 붙인 채 비를 피하려는 그녀의 모습이 유난히 작아 보여서, 나는 서둘러 차에서 우산을 꺼내 그녀에게 다가갔다. "우산 쓰세요." 짧게 건네는 나에게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우산을 받아들었고,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도 그 작은 반응이 어제와는 조금 다르다는 걸 느끼며 속으로 안도했다. 예전 같았으면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쳤을 텐데, 지금은 순순히 우산을 받아 든 채 빗물이 스민 어깨를 툭툭 털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녀가 나지막이 덧붙인 그 두 글자가, 나는 며칠 만에 처음 들은 것이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빗소리에 섞여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대기실로 이동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평소와 달리 먼저 말을 걸었다. "이 근처에 커피 파는 데 있어요?" 뜻밖의 질문에 나는 재빨리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조금 걸어가면 있는데, 아이스 아메리카노 좋아하세요?" 그녀는 잠깐 나를 쳐다보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는 언젠가 스케줄표 메모에서 봤던 그녀의 선호 음료를 우연히 기억해뒀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별것 아닌 정보 하나가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우산 하나 아래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그 짧은 거리가, 나는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빗소리와 우산에 부딪히는 물방울 소리만이 침묵을 채우고 있었는데,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다는 게 오히려 낯설었다. 커피를 사서 돌아오는 길,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매니저님은 왜 이 일을 하게 됐어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진짜 모습을 못 보고 오해받는 게 안타까웠거든요. 그런 걸 조금이라도 바꿔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말에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커피잔을 쥔 손끝이 살짝 떨리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 미세한 반응이, 나는 그녀의 마음 어딘가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창문에 흐르는 빗물 사이로 비치는 그녀의 옆얼굴을 슬쩍 훔쳐보다가, 나는 문득 아까 스크랩북에서 봤던 젊은 시절 그녀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의 그녀와 그때의 그녀가, 아주 잠깐이지만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혹시 지금 내 앞에서, 아주 조금씩 그 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걸까. 그런 기대를 품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서, 나는 애써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더 이상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 흐르던 공기는 분명 아까와는 달랐다. 그날 밤,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휴대폰이 울렸다. 팀장이었다. "박준서 쪽에서 다시 연락이 왔어. 서현이랑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오늘 낮에 그녀와 나눈 짧은 대화가 무색해질 만큼 다시 마음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직접 만나서요?" 나는 되물으며 손끝으로 운전대를 가볍게 두드렸다. 팀장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지만, 나는 그 말 한마디가 오늘 하루 애써 쌓아온 무언가를 단숨에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왜 이 타이밍에,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나는 그 불안의 정체를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녀가 이 소식을 듣고 나면 오늘 낮 우산 아래서 보였던 그 작은 온기가 다시 차갑게 얼어붙을지도 모른다는 예감뿐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빗줄기가 조금씩 잦아드는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내일 그녀에게 이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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