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혈풍 속 마지막 제자

1화

대전의 공기는 얼음장 같았다. 강도윤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릎 아래로 스며드는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지만, 그는 미간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벌써 십오 년째다. 이 정도 냉기쯤이야 감기 몸살 축에도 못 낀다.' 상석에는 해동제국의 대원수, 강무성이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도윤을 스치듯 지나갔을 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저 눈빛, 십오 년째 한결같으시군. 마치 벽에 걸린 족자를 보듯 하시니.' 도윤은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겉으로는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더 낮췄다. 대전 안의 문무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은 이미 도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마치 대전 구석에 놓인 낡은 화병이라도 보는 듯한, 그런 무심한 시선들이었다. '저치들은 하나같이 눈에 생기가 없구나. 뭐, 본좌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 "아홉째 도윤." 대전 총관의 목소리가 대전을 갈랐다. "후천육단에 머문 지 벌써 삼 년째다." 총관의 말투에는 경멸이 배어 있었다. 도윤은 그 경멸에 이미 익숙했다. '삼 년이라, 정확히 셌구먼. 날짜까지 세어가며 벼르고 있었을 줄이야.' "주군의 명이시다. 일주일 후, 실력 검증이 열린다. 그때까지 후천고단에 오르지 못하면—" 총관은 잠시 말을 끌었다. "본가로 추방이다." 숨이 턱 막혔다. 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이 잠깐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대전의 높은 천장이, 붉은 기둥들이, 상석에 앉은 아버지의 얼굴이 뒤섞여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추방이라니. 그 말은 곧, 어머니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뜻이거늘.'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어머니였다. 평민 출신의 서씨. 대원수의 아이를 낳았다는 죄로, 낳자마자 아들을 빼앗기고 궁 밖 어느 처소에 갇혀 지내고 있다는 어머니였다. 도윤은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궁의 하녀들이 흘리는 말들, 밤마다 몰래 훔쳐본 서신 몇 장으로 그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그를 걱정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가 패배자로 낙인찍혀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서신에 적힌 글씨가 삐뚤빼뚤했었지. 손이 떨렸던 게로군. 그 손으로 십오 년을 버텨오셨을 텐데.' 도윤은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서신의 문장들이 떠올랐다. '도윤아, 부디 몸을 상하게 하지 마라.' '어미는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정작 걱정을 해야 할 사람은 갇힌 어미 쪽이었을 텐데, 서신 속 어머니는 늘 아들만을 염려했다. '그 마음에 답을 해야 할 게 아닌가. 추방이라는 두 글자로 갚아드릴 순 없지.' "이의 있는가?" 총관이 물었다. "없습니다." 도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겉으로는 그랬다. 속으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일주일. 겨우 일주일 안에 두 단계를 뛰어넘으라는 소리로군. 후천육단에서 삼 년을 머물던 놈에게.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형제들은 모두 후천팔단을 넘어섰다. 몇몇은 이미 후천극단에 닿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버지의 정실 소생인 그들에게는 최고의 사부, 최고의 영약, 최고의 무공 비급이 아낌없이 주어졌다. '그들이 삼 년간 삼킨 영약을 쌓으면 대전 천장에 닿고도 남을 게다. 반면 이 몸이 삼킨 건 겨우 조약탕약 몇 사발이었으니.' 도윤에게 주어진 것은 낡은 목검 한 자루와, 대전 구석에서 삼 년째 같은 초식을 가르쳐온 늙은 사부 하나뿐이었다. '그마저도 감사해야 할 처지지. 배 다른 형제들 중엔 사부조차 없이 방치된 놈도 있었으니.' 총관이 물러가라는 손짓을 하자, 도윤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대전을 나섰다. 등 뒤로 대신들의 낮은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저러다 정말 쫓겨나는 게 아니겠소." "쫓겨나면 오히려 다행이지, 서씨 소생이 대전에 얼쩡거리는 것도 볼썽사나운데." 도윤은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귀는 밝은데 참는 건 더 잘하지. 십오 년을 그렇게 살아왔거늘.' 강씨 구장로, 강필호. 대전을 나선 도윤을 그가 회랑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회랑 창밖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이 강필호의 백발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이보다 굵게 잡힌 주름살이, 오늘따라 더 깊게 도윤의 눈에 박혔다. "사부님." 도윤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들었느냐." 강필호의 목소리는 낮고 잠겨 있었다. "들었습니다." 강필호는 오랫동안 도윤을 가르쳐온 사람이었다. 처음 그를 맡았을 때만 해도, 강필호는 다른 사부들처럼 도윤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따뜻하게 어깨를 두드려주기도 했다. '그 온기가 언제까지 갈지, 사실 나도 궁금했었다. 사람이란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도윤은 지난 삼 년을 떠올렸다. 강필호가 가르친 것은 초급 검로 몇 가지, 그리고 기본 좌공법이 전부였다. 형제들이 익힌 상승 무공에 비하면 하품 중에서도 하품이었다. 매일 새벽, 도윤은 회랑 뒤편 낡은 연무장에서 목검을 휘둘렀다. 겨울에는 손끝이 갈라지도록 찬 바람을 맞으며, 여름에는 등줄기가 흠뻑 젖도록. 강필호는 그 옆에서 팔짱을 낀 채 같은 초식을 반복시켰다. '같은 자세, 같은 호흡, 같은 발놀림. 삼 년째 똑같은 걸 시키니 이젠 눈 감고도 하겠구먼.' 물론 도윤은 그 반복 속에서도 나름의 것을 얻어냈다. 겉으로는 육단에 머문 어리숙한 아이 행세를 하면서, 속으로는 본래 지니고 있던 수백 년 내공을 다스리는 감각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었으니. '후천육단이라, 우습기도 하지. 본좌가 마음만 먹으면 이 대전 기둥을 통째로 무너뜨릴 수도 있거늘.'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봉인된 힘을 함부로 드러내는 것도, 갑작스레 경지를 뛰어넘는 것도 의심을 살 뿐이었다. 그래서 도윤은 삼 년을 인내했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마치 얼음이 녹아 스미듯. "도윤아." 강필호가 입을 열었다. "네 자질은... 솔직히 말하마. 형제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담담함 뒤에 무언가 다른 것이 숨어 있는 듯했다. '저 눈빛이 낯설군.' 도윤은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삼 년간 봐온 강필호의 눈빛과 지금의 눈빛이 어딘가 달랐다. 마치 다른 사람이 그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이는 미세한 흔들림, 그것은 걱정이 아니라 어떤 계산에 가까운 빛이었다. '삼 년을 지켜봐온 얼굴이거늘, 오늘은 왜 이리 서먹한고.'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강필호가 말을 이었다. "단, 위험한 방법이지." "어떤 방법입니까." 강필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회랑 밖, 저 멀리 어스름하게 보이는 산줄기를 바라보았다. 험준하고 검붉은 봉우리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봉우리 사이로 낮게 낀 안개가 마치 살아 있는 짐승처럼 꿈틀거렸다. "혈풍산." 강필호가 그 이름을 뱉었다. 도윤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제국의 아이들에게 혈풍산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곳에 들어간 자는 백 명 중 하나도 살아 나오지 못한다는 금단의 땅. 어릴 적 유모가 잠들지 않는 아이들을 재우려 할 때마다 늘어놓던 이야기 속에도 혈풍산이 등장했다. '자꾸 울면 혈풍산 귀신이 데려간다.' 그 말 한마디에 아이들은 이불 속으로 숨어들곤 했었다. '그 산이 정말 존재하는 곳이었다니. 유모의 겁박이 헛말이 아니었구먼.' "그곳에는..." 강필호의 목소리가 유혹하듯 낮아졌다. "기연이 있다. 죽음을 각오한 자에게만 열리는 기연이지."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노인, 방금까지의 걱정스러운 눈빛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삼 년간 알아온 사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딘가 낯선 결이 섞여 있었다. 마치 오래된 벗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그 안에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는 느낌. '허나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던가.' 없었다. 일주일. 겨우 일주일 안에 후천고단에 오르지 못하면 어머니와의 마지막 끈조차 끊어질 것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형제들처럼 최고의 영약과 비급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위험한 방법이라도 좋다. 어차피 본좌의 명줄은 그리 쉽게 끊어지지 않을 것이거늘.' 강필호는 그런 도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렸다. 그 미소가 도윤의 눈에는 이상하게 낯설게, 그리고 서늘하게 박혔다. '저 웃음, 마치 무언가를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이 아닌가.' 회랑에 스며드는 오후 햇살이 어느새 서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 혈풍산의 검붉은 봉우리들이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 낮은 안개 속에서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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