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짐승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거대한 몸뚱이가 허공을 가르며 짓쳐 들어오는 순간, 도윤의 눈에는 그 짐승의 이빨 하나하나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느리다. 아니, 내가 빠른 것인가.'
생각은 짧았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도윤은 몸을 옆으로 굴렸다.
콰악!
짐승의 발톱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그대로 갈랐다. 흙과 나뭇잎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그의 뺨을 때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이 날아갔겠군.'
도윤은 몸을 일으키며 단검을 고쳐 잡았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자꾸 미끄러졌다. 칼자루를 다시 움켜쥐는 손끝이 떨렸다.
'후천육단짜리 몸으로 이런 걸 상대해야 한다니. 참으로 서글픈 일이거늘.'
속으로는 그런 헛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도윤의 두 눈은 짐승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좇고 있었다.
짐승이 다시 몸을 돌려 달려들었다.
이번엔 발톱이 아니라 몸통 전체로 밀어붙이는 돌진이었다. 도윤은 좌우로 시선을 굴려 도망칠 틈을 가늠했다. 늦었다.
도윤은 이번엔 피하지 못했다. 짐승의 앞발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악!"
뜨거운 통증이 어깨에서 터졌다. 도윤은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살갗이 찢어지는 감각과 함께 옷자락이 붉게 물들었다.
'이대로는 죽는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아버지도, 형제들도, 강필호도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몸이든 아니든, 지금 이 몸이 짐승의 이빨에 물리면 그대로 끝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몸뚱이가 부실하니 별수 없구나. 도망친다.'
도윤은 다친 몸을 이끌고 산비탈을 따라 무작정 달렸다. 짐승이 그 뒤를 쫓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거친 숨소리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발밑이 갑자기 사라졌다.
도윤은 균형을 잃고 앞으로 굴러떨어졌다.
비탈길이었다. 몸이 데굴데굴 굴렀고, 나뭇가지와 돌부리에 부딪히며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스쳤다. 등이, 옆구리가, 무릎이 차례로 부딪혔다. 눈앞이 번쩍거렸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한참을 굴러 떨어진 끝에, 도윤은 어느 좁은 계곡 바닥에 멈춰 섰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위에서 멀어져 갔다. 다행히 비탈을 따라 내려오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도윤은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숨을 죽였다.
도윤은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어깨의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옷감이 축축했다.
'여기서 죽을 순 없다. 어머니께 아직 얼굴 한 번 보여드리지도 못했거늘.'
그 한 마디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수백 년을 산 존재라면서, 겨우 어머니 얼굴 한 번 못 봤다는 게 뭐가 그리 서러운지. 그런데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 한구석이 저려왔다.
도윤은 넷째 형이 준 지혈산을 상처에 발랐다. 따가움이 온몸을 관통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 정도 통증에 소리를 지르면 근처의 무엇이 또 몰려올지 알 수 없었다.
'참자. 참으면 산다.'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밤이 오고, 다시 새벽이 밝았다. 도윤은 계곡물 소리에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그는 일어났다.
계곡을 따라 걷던 도윤은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마다 어깨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걷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멈추지 않았다.
작은 폭포 근처에서 물을 마시고, 마른 육포로 배를 채웠다. 몸은 여전히 아팠지만, 조금씩 기력이 돌아왔다. 폭포 물에 얼굴을 씻자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이렇게 미욱한 몸으로 여기까지 온 것도 용하다. 본좌가 이런 산속을 헤매고 다닐 신세가 될 줄 뉘 알았으랴.'
그런 자조 섞인 생각을 하면서도 도윤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사람이 사는 마을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산을 내려가는 방향으로 걸을 뿐이었다.
이틀째 밤, 도윤은 절벽 근처의 좁은 길을 걷고 있었다.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어둠이었다. 구름이 하늘을 온통 뒤덮어 별빛 한 점도 새어 들지 않았다. 발밑은 미끄러웠고, 한 발 잘못 디디면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질 듯했다.
도윤은 손끝으로 절벽 벽을 짚으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때, 저 멀리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무겁고, 서늘하고, 마치 죽음 그 자체가 걸어오는 듯한 기운.
도윤은 걸음을 멈췄다.
'저건 뭐지.'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떨렸다. 후천육단의 미약한 감각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 기운은 그가 지금까지 상대했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짐승 따위가 아니다. 저건... 사람인가. 아니, 사람의 기운이라 하기엔 너무나 짙다.'
도윤의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기운을 겪어봤다 자부했건만, 이런 종류의 서늘함은 처음이었다. 마치 심연 그 자체가 걸음을 옮기며 다가오는 듯한 압박감이었다.
'멀리 있는데도 이 정도라니. 가까이 왔다면 본좌라도 버티지 못했을지고.'
도윤은 조용히 몸을 숨기려 했다. 숨을 죽이고 뒷걸음질 치며 바위 그늘로 몸을 옮기려는 순간, 그의 발밑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하지만 발밑의 돌이 미끄러졌다.
와락!
중심을 잃은 도윤의 몸이 절벽 끝으로 쏠렸다.
손끝이 허공을 움켰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안 돼—!'
찰나의 순간, 도윤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직 마을에도 닿지 못했는데, 아직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떨어져 죽는다는 것인가.
도윤의 몸이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어둠이 그를 삼켰다. 바람 소리만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고, 저 아래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