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혈풍 속 마지막 제자

2화

다음 날 새벽, 강필호는 도윤을 연무장 뒤편 창고로 불러들였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사위는 푸르스름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창고 문을 밀고 들어서자 먼지 냄새와 오래된 목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벽에 걸린 낡은 목검들이 희미한 새벽빛을 받아 검은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훈련을 시키겠다는 겐가.' 도윤은 창고 안을 둘러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연무장이 아니라 굳이 이 낡은 창고를 택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남의 눈을 피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감추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부터 하루도 쉬지 않는다." 강필호가 말했다. 그의 말투는 어제보다 더 차가워져 있었다. "예." 도윤이 대답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하루도 쉬지 않는다는 건, 결국 시간이 없다는 뜻이겠지. 일주일. 그 안에 두 단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면 정공법으로는 답이 없다.' 첫 초식을 시작하자마자, 강필호의 목소리가 매섭게 떨어졌다. "틀렸다. 다시." 도윤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삼 년간 배운 초식이었다. 손끝의 각도, 발의 위치, 호흡의 흐름까지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는 동작이었다. 틀릴 리가 없었다. '분명 어제와 똑같이 시전했거늘.' 허리를 낮추고, 검을 비틀고, 다시 뻗었다. 삭,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갈랐다. "다시." 강필호가 또 말했다. 이번엔 어디가 틀렸는지조차 말해주지 않았다. 도윤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처음 자세로 돌아갔다. 같은 초식을 열 번쯤 반복하자, 도윤의 허벅지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옷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몸에 감겨 붙었다. 열두 번째, 열세 번째. 강필호는 여전히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다시." 도윤의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이 빠지려는 걸 억지로 붙잡았다. '이건 초식이 틀린 게 아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사부님은 애초에 틀렸다고 할 생각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닌가. 무엇을 시켜도 틀렸다 말할 셈이라면, 이건 초식을 고치는 훈련이 아니라—'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창고 문이 벌컥 열리며 몇몇 형체가 안으로 들어섰다. 둘째 형 강도훈과 셋째 형 강도열이었다. 둘 다 이미 후천극단에 근접한 실력자들이었다. 두 사람 다 잘 다려진 무복을 걸치고, 아침부터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오, 여기 있었네. 우리 아홉째." 강도훈이 팔짱을 끼고 웃었다. "일주일 만에 두 단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며?" "불가능한 걸 억지로 시켰다는 얘기던데." 강도열이 낄낄거렸다. "아버님도 참 잔인하시지." 도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검을 늘어뜨린 채로 숨을 몰아쉬며 두 형을 바라보았다. '저들이 이렇게 몰려온 건 그저 구경거리가 필요해서겠지. 내가 무너지는 모습을.' 강도훈이 창고 안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코를 찡그렸다. "이런 먼지 구덩이에서 훈련을 받는다니. 아홉째, 너도 참 처지가 딱하구나." "딱한 게 아니라 원래 이 정도 대우가 맞는 거지." 강도열이 정정했다. "평민의 피가 섞였으니 그럴 만도 하잖아." 도윤의 눈가가 살짝 굳었지만, 이내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참아라. 아직은 아니다.' "장로님, 굳이 저런 놈을 붙잡고 계실 필요 있습니까?" 강도훈이 강필호에게 물었다. "어차피 답이 안 나오는 자질인데. 시간 낭비지요." "맞습니다. 차라리 저희 훈련이나 봐주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강도열이 맞장구쳤다. 강필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도윤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형제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도윤에게만 고정된, 무언가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 도윤은 다시 한 번 위화감을 느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사부님. 형들의 조롱을 막지도 않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침묵이 길어지자 강도훈이 먼저 흥미를 잃은 듯 하품을 했다. "뭐, 대답 안 하실 거면 저희는 이만—" "도윤아." 강필호가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입을 열었다. "내가 아까 말했던 그 방법, 기억하느냐." 도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강도훈과 강도열의 눈빛이 동시에 반짝였다. 방금까지의 지루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두 사람의 얼굴에 노골적인 호기심이 떠올랐다. "방법이라니, 뭡니까?" 강도열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강필호는 잠시 침묵했다. 창고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혈풍산이다." 강필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창고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바람 한 줄기가 문틈으로 새어들어 낡은 목검들을 흔들었다. 딱, 딱,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혈풍산이라니..." 강도훈이 헛웃음을 흘렸다. "장로님, 지금 저놈을 죽이자는 겁니까?" "그곳에는 기연이 있다." 강필호가 반복했다.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말이지. 죽음을 각오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 "기연이 있으면 지금까지 어째서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습니까." 강도열이 코웃음을 쳤다. "제가 알기로는 그곳에 들어간 자들 태반이 시체로 돌아왔다던데요." "성공한 자가 없었으니까 전해지는 것이겠지." 강필호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 있었다. 도윤은 그 말속에서 무언가 이상한 흐름을 느꼈다. '이 노인은 지금 나를 부추기고 있다. 죽을 확률이 백에 아흔아홉인 곳으로.' '하지만 왜. 나를 죽이려는 것이라면 굳이 이런 절차를 밟을 이유가 없다. 그냥 방치하면 될 일이거늘.' 강도훈이 팔짱을 낀 채 도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에는 노골적인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어이, 아홉째. 어떡할래? 진짜 갈 생각이야? 아니면 여기서 그냥 포기하고 무사 자격 박탈이나 당할래?"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셈을 굴렸다. '일주일 안에 두 단계를 뛰어넘는 것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혈풍산이 아무리 위험하다 해도, 이곳에 남아 형들의 노리개가 되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설령 죽는다 해도— 그것으로 끝이라면, 적어도 지금처럼 매일 짓밟히며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제가..." 도윤이 입을 열었다. "혈풍산으로 가겠습니다." 강도훈과 강도열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 놈. 진짜 갈 생각이야?" 강도훈이 배를 잡고 웃었다. "거참, 재밌는 결정이네. 죽을 걸 알면서도 가겠다니." 강도열도 낄낄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목숨을 거는구나." 강도열이 조롱하듯 말했다. "평민 계집이 낳은 자식답게, 참 멍청한 결정이야." 도윤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평민 계집이라니.' 어머니를 향한 그 말에, 도윤의 눈빛이 처음으로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검을 쥔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뼈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강도훈은 그 반응을 눈치채고도 더욱 짓궂게 웃었다. "어, 표정 봐라. 화났나? 사실을 말한 건데 왜 그런 얼굴을 해." "평민 출신이 뭐가 어때서. 그냥 사실 아니야?" 강도열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 어미가 그런 신분만 아니었어도, 지금 네가 이런 취급을 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도윤은 이를 악물었다. 목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지우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지금 저들과 부딪혀서 얻을 게 없거늘. 이 자리에서 검을 뽑는다 한들, 나는 저 두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참아라, 도윤아. 참는 것도 힘이다.' 강필호는 형제들의 조롱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한참을 웃던 강도훈과 강도열은 흥미가 시들해지자 곧 자리를 떴다. 창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정적이 다시 창고 안을 채웠다. "허락은 내가 대원수님께 받아두었다." 강필호가 말했다. "모레 새벽, 출발이다." 도윤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필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고를 나섰다. 창고를 나서는 강필호의 등을 바라보며, 도윤은 문득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이건 아버지의 뜻이거늘. 사부님은 그저 그 뜻을 대신 전할 뿐이겠지.' '혈풍산이라는 이름을 굳이 형들 앞에서 꺼낸 것도, 결국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게 하려는 의도였을지도.' '그렇다면 이건 시험인가, 아니면 처형인가.' 버림받은 자식에게,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하나의 문을 열어준 것일까, 아니면 죽음의 문을 열어준 것일까. 도윤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문 뒤에 무엇이 있든, 이제는 그곳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텅 빈 창고 안, 도윤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에 쥐어진 검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창고 틈으로 스며드는 새벽빛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속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모레 새벽이라 했으니, 남은 시간은 이틀뿐이다.' '그 이틀 동안 해야 할 일이 많다.' 도윤은 검을 다시 고쳐 잡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훈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